"원룸에서 자다 죽을지도 모른다" 청년의 삶 잠식한 ‘기후 불안’
“폭염 속 내 집도 안전하지 않았다”
“전기세·난방비·식비까지 생존 걱정”
IPCC, ‘기후불안’ 정신건강 위협 공식화
보사연 “한국 기후불안 점수, 이미 위험 수위”
편집자주
산업화(1850~1900년) 이후 지구 평균 기온 1.5도 상승. 이 수치는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앙의 마지노선으로 불립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우리가 몰랐던 기후행동' 후속으로 1.5도에 임박한 기후 위기 현실, 이를 막기 위한 노력들을 격주로 폭넓게 연재합니다.

“사람이 더워서 죽을 수도 있구나. 그것도 내 집에서 자다가. 기후 재난 앞에선 집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환경운동가 김보림(33)씨가 처음으로 ‘기후 불안’ 증세를 겪기 시작한 건 역대 최장기간의 폭염이 닥쳤던 8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2018년은 대한민국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해였는데요. 서울의 낮 기온이 39.6도까지 치솟아 111년 만에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고, 밤 최저 기온마저 30도에 육박했습니다. ‘낮에도 지옥, 밤에도 지옥’이란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정도였죠.
당시 보림씨 가족이 살던 오래된 다세대 주택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열대야로 온 가족이 밤잠을 설치는 날이 이어지던 중 보림씨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대의 중년 여성이 에어컨 없는 자택에서 잠을 자다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기후 위기가 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야외에서 몸 쓰는 일을 하던 오빠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에어컨 없는 우리 집은 오늘 밤 괜찮을지 매일 불안했죠.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무력해지기도 했고요.”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보림씨는 이듬해 환경단체에 합류했는데요. 그 후 7년간 꾸준히 기후 위기에 대해 알려왔지만, 마음속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청년들 덮친 심리적 재난

보림씨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기후 위기에 가장 오랜 피해를 입을 세대인 2030 청년층을 중심으로 ‘기후 불안’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기후 불안이란 기후 위기로 인해 현재와 미래의 삶이 크게 위협받는다는 인식에서 생겨나는 지속적인 두려움·불안·무력감, 환경을 망가뜨린 이전 세대에 대한 분노 등 심리적 고통을 뜻합니다. 폭염과 폭우 등 극단적 날씨가 ‘뉴노멀’이 되면서, 이런 정서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10대 후반부터 기후 행동을 실천해 온 윤현정(22)씨 역시 6년 전 태풍 ‘마이삭’을 겪은 이후 보림씨와 비슷한 기후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현정씨가 살던 울산은 원전 가동을 멈춰야 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전기가 끊기고, 학교가 문을 닫고, 매일 오가던 거리가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며 정말 무서웠어요. 말로만 배웠던 기후 위기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상경해 자취를 시작하면서는 현실적인 생존 문제까지 덮쳤습니다. 폭염과 혹한이 매년 더 극심해지면서, 여름엔 전기세, 겨울엔 난방비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게 된 겁니다. 현정씨는 환경을 생각해 채식을 실천하고 있는데요. 가뭄, 폭우 등의 기상 이변으로 채소 가격이 갑자기 폭등하면 식비 부담까지 겹친 ‘이중고’를 겪는다고 합니다. 살림살이가 점점 더 팍팍해지는 탓일까요. 최근엔 환경에 큰 관심이 없던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호소가 터져 나옵니다.
“친구들을 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왜 이렇게 더워?’ ‘너무 추운 거 아냐?’ 하고 말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단순한 불만에서 끝나지 않는 심각한 불안을 느끼는 거죠. 기후 위기가 실제 삶의 위협으로 체감되고 있으니까요.”

날씨가 안 좋으면 기분도 쳐지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 아니냐고요? 기후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위협하는 재난이 된 시대인 만큼, 기후 불안은 더 이상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국제사회도 중대한 문제로 규정했어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22년 제6차 보고서에서 기후 위기 노출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로 기후 불안을 공식화하며 “기후불안은 직접적인 재난을 겪지 않더라도 미디어나 타인을 통한 대리 노출만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누구라도 기후 불안의 고위험군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만성적 불안은 청년들의 장기적인 생애 주기 설계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기후 위기를 비관한 나머지 2세를 가지지 않기로 결정하는 청년이 많아졌기 때문인데요. 2021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33%는 기후 변화 등 환경 문제 때문에 자녀를 갖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기후 변화 공포가 세계 출산율을 더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죠.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090814180002416)
한국 성인 기후불안 점수, 이미 ‘위험 수위’ 빨간불
한국의 상황도 위태롭습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평균 기후 불안 점수는 이미 경증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데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달 발간한 ‘미래세대 기후불안에 대한 심층 분석과 중재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만 19~64세 성인 2,000명을 조사한 결과 한국 성인의 기후 불안 평균 점수는 5점 만점에 1.92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경증 우울 위험 기준점(1.76점)’을 훌쩍 넘어선 수치로, 한국의 기후 불안 수준에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청년 세대는 심리적 스트레스에 더욱 민감했습니다. 중등도 우울증 위험이 시작되는 기후 불안 점수가 장년층은 2.44점인 반면, 청년층은 2.24점으로 더 낮았습니다. 청년들이 기성세대보다 더 적은 자극에도 더 높은 우울감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잠재적 높은 불안군’ 비중 에서도 청년 세대(34.3%)가 장년 세대(25.8%)를 크게 압도했다고 합니다.
청년들의 불안은 이중적인 양상을 띠기도 합니다. “기후 변화를 걱정하느냐”는 단순 질문에는 낮게 응답하면서도, 정밀 척도 검사에서는 높은 수치를 보인 것입니다. 학업과 취업이라는 당면 과제 탓에 기후 위기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려 애쓰지만, 이미 내면의 정신적 고통은 임계치에 다다랐음을 시사합니다.
“원룸서 자다 죽을지도 모른다”... 기후가 가른 삶의 격차

기후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고통은 2024년 청소년기후행동이 ‘기후 헌법소원’을 제기했을 당시 제출한 국민참여의견서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기후가 망가진 세상에선 도저히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죽고 싶다”(장모씨·29)거나,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게 미안해 단념했다”(김모씨·27)는 고백은 기후 위기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삶의 근간을 흔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거와 경제적 격차에 따른 비관도 적지 않았습니다. “6평(19.83㎡)짜리 원룸이 너무 더워 자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다”(정모씨·29), “폭염과 장마로 앞으로는 매년 흉작이 이어질 텐데, 2년쯤 뒤엔 장 보다가 파산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오모씨·34)는 호소는 기후 재난이 약자에게 얼마나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전문가들은 이 불안을 외면하기보다 사회적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채수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의료정책연구실 부실장은 지난 8월 열린 ‘미래세대 기후불안 극복을 위한 포럼’에서 “현재 한국의 기후 불안 수준은 우려보다는 적극적 관심이 필요한 단계”라며 “이 불안을 기후 행동을 촉진하는 동기부여와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내상에 대한 심리적 지원 조치가 반드시 병행되어야겠지요.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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