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귀 대신 ‘머리’를 믿었던 빗나간 천재… 맥아더는 그래서 실패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上: 12면체 인간의 초상③
편집자주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는 할 말이 참 많은 인물입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3개월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 글은 세 번째입니다.
※ '12면체 인간의 초상 2'에서 이어집니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4490000739)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5490003090)

“맥아더는 1918년의 그가 아니었다. 부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는데, 핵심 요직조차 잘 보지 않았다. 그는 참호나 야전사령부가 아니라 요새 같은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 사무실을 지키는 것은 리처드 서덜랜드라는 비밀스럽고 우월감으로 가득 찬 인물로 대표되는 참모진이었다.”
(필리핀 시절 맥아더를 묘사한 미국 역사가 앨런 숌)
제7면 인의 장막: 충신을 내친 군주
나이가 들수록, 계급이 올라갈수록, 참모들과의 연령 차가 벌어질수록, 맥아더의 생각은 무뎌졌고 태도는 경직됐다. 2차대전(61~65세)과 한국전쟁(70~71세)의 맥아더는 1차대전 때 병사들과 함께 쏟아지는 포화 속을 누비던 그 용맹한 열혈 장군이 아니었다. 최고급 호텔 숙소의 안락함, 후방 사령부의 평온함에 길들여져, 전투 현장 순시도 잘 나가지 않았다. 바탄 전투(1942년 일본 필리핀 침공)에서 희생된 부하들을 기리고자 전용기에 ‘바탄’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바탄 전투 77일 동안 맥아더가 현장을 방문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유엔군사령관 재직 9개월 동안 한국에서는 1박도 한 적이 없다. 전용기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해 잠시 한국을 들렀다가, 언제나 밤이 되면 도쿄로 돌아갔다.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 눈과 귀 대신 자기의 머리를 더 신뢰하는 그 성품 때문에, 맥아더 곁에는 최고사령관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따르려는 추종자들만 남았다. 그나마 7년 동안(1932~1939년) 옆에서 바른 말을 하던 아이젠하워가 워싱턴으로 돌아가 마셜을 보좌하게 되자, 맥아더 참모진의 ‘간신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국으로 돌아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는 부하들이 자기 명성을 가로챌까 봐 전전긍긍하는 정신병자”라고 악담을 퍼부었고, 맥아더 역시 아이젠하워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놈의 배신자”라고 폄훼했다.
어쨌든 참모장 아이젠하워가 ‘탈출’하면서 맥아더를 둘러싼 ‘인의 장막’은 더 두꺼워졌다. 맥아더가 완고해질수록 참모들은 맥아더 입맛에 맞는 보고·정보만 올리게 됐고, 그 편향된 정보 때문에 맥아더는 더 현실과 멀어졌다. 악순환이었다. 1차대전 때 퍼싱의 ‘쇼몽 사령부’를 욕하던 맥아더가 그보다 훨씬 더 폐쇄적인 ‘예스맨 집단’을 자기 근처에 꾸린 것이었다.
필리핀 시절 맥아더를 보좌하다가 1942년 바탄 전투 도중에 함께 탈출한 이 참모진들을 ‘바탄 갱’ 또는 ‘바탄 보이즈’라고 부른다. ‘바탄 갱’은 맥아더의 이너서클 엘리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와도 같았는데, 나중에 한국전쟁 당시 도쿄 유엔군사령부에서 맥아더를 보좌하던 장교 상당수가 이 ‘바탄 갱’ 출신이다.
“맥아더는 다방면에 걸쳐 비범한 재능을 지녔지만 인물에 대한 판단력은 형편없었다.”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참모 중 가장 횡포가 심했고 문제가 많았던 장군을 꼽자면 세 명 정도의 이름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문고리 권력자’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이다. 중국에서 대대장을 하던 소령 서덜랜드는 1938년 필리핀 군사고문 맥아더의 참모부에 들어가면서 쾌속 승진을 시작했다. 1939년 아이젠하워로부터 참모장(중령) 자리를 물려받고, 1941년에 준장·소장,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연대·여단·사단장도 거치지 않고 참모로서만 3성장군이 된 특이한 경우였는데, 맥아더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덜랜드는 부하들과 동료 장군들에게 폭언을 일삼았고, 자신이 맥아더 대신 보고의 중요성을 판단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면담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문고리 권력’으로 악명 높았다. 일본의 필리핀 침공 당일인 1941년 12월 8일에도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들은 항공대장 루이스 브레러튼(소장)이 맥아더를 찾아갔지만, 서덜랜드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장군님 바쁘시다”며 브레러튼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가 급하던 순간 서덜랜드가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서, 브레러튼은 B-17 폭격기들을 출격시킬 수 없었고 미군은 이른 반격의 기회를 놓치게 됐다. 나중에 서덜랜드는 호주군 장교의 부인을 연인으로 삼아 사령부에 두고 ‘대위’ 계급으로 데리고 있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거듭했다. 전쟁 후 서덜랜드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맥아더 휘하에서 6군사령관을 지냈던 월터 크루거 장군은 “인류에게 좋은 일”이라는 촌평을 남겼다.

두 번째는 ‘눈 감고 귀 막은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이다. 1940년 필리핀 주둔군 군수참모로 배치된 윌로비는 1941년 맥아더가 현역으로 복귀하자마자 정보참모로 발탁된다. 정보통도 아니었지만 맥아더에게 남다른 충성심을 보여 준 덕분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그는 숱한 정보 실패를 저질렀다. 일본의 공격 시점을 1942년 6월로 예측하는 바람에, 1941년 12월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50년 6월 미국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맥아더 사령부 정보 책임자는 여전히 윌로비였다.

세 번째는 ‘맹목적 충성파’ 에드워드 알몬드다. 알몬드는 ‘바탄 갱’ 출신이 아니라 맥아더가 도쿄에 부임한 뒤에 뒤늦게 합류한 참모였다. 그는 원조 바탄 갱들을 능가하는 아부와 충성심을 과시하며 맥아더의 눈에 들더니, 급기야 참모장 자리를 꿰차고 인천상륙작전 때는 군단장으로까지 진급했다. 6·25 전쟁 초반 8군사령관 월튼 워커가 맥아더에게 했던 건의를 중간에서 묵살하거나 가로막았던 장본인이 바로 알몬드다.
맥아더의 참모 수준이 이 정도였다. 그나마 맥아더 휘하 전투부대 사령관에는 상당히 능력 있는 장군들이 배치됐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월터 크루거(6군사령관)와 로버트 아이첼버거(8군사령관), 한국전쟁에서의 월튼 워커(8군사령관)와 매슈 리지웨이(8군사령관) 등은 맥아더 참모들의 결점을 채울 만큼 장점이 많은 지휘관들이었다. 그 이유는 야전군사령관 인사는 맥아더가 직접 할 수 없었고, 대통령이나 합참의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일본이 침공한다면 연합군 병력 절반만으로도 일본을 가지고 놀 수 있다.”
(1941년 일본의 필리핀 침공 전 맥아더의 인터뷰)
제8면 과소평가: 적을 얕보는 버릇
맥아더의 자만은 적에 대한 감시와 연구를 게을리하는 버릇을 낳았다. 장수가 적을 과하게 두려워했더라면 전쟁·전투에 대한 대비 태세라도 단단하게 할 수 있었겠지만, 맥아더는 항상 적을 얕보다가 큰코다치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서 맥아더는 거듭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후퇴해야 했다.
1941년 중반, 일본이 진주만과 필리핀을 기습(12월 8일)하기 몇 달 전. 이때 맥아더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본과의 전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맥아더가 27세의 열혈 기자 존 허시(나중에 퓰리처상 수상)와 했던 인터뷰에 대비 태세가 잘 드러나 있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장기전(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힘이 빠졌다”면서 “절반가량 병력의 효율이 1등급에서 3등급으로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또 일본 정부가 서양의 강대국을 두려워하고 있고, 이미 유럽에서 전쟁을 시작한 독일(1940년 일본과 삼국동맹 체결)이 같은 추축국 일본의 개전을 말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틀린 내용이었다. 효율이 떨어진 군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일본 정부의 개전 의지는 맥아더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됐을 때도 이 과소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미군의 최대 군사기지 진주만을 공격했다면 분명히 큰 손실을 봤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일본이 필리핀 쪽에서는 곧장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공격하더라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딱히 없었다. 자신의 지레짐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은 지 10시간 만에 일본군의 대규모 공습을 당해, 클라크 비행장에 세워 뒀던 알토란 같은 전투기·폭격기들을 대부분 잃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과소평가로 적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개전 직후부터 북한군의 전력과 전투력을 무시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마침 공화당 정치인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가 도쿄에 있었는데, 맥아더는 덜레스 보좌관에게 “한 손을 뒤로 묶고서도 북한군을 처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9년 전 병력 절반만으로도 일본군을 가지고 놀 수 있다”(언론 인터뷰)고 했던 방약무인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미군 1개 대대만 투입해도 북한군이 미군 출현에 깜짝 놀라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견대로 나섰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1개 보병대대+1개 포병포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벌어진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 땅으로 진격하면서는 중공군의 전력과 참전 가능성을 무시했다.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기 정확히 열흘 전인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은 고작해야 5만, 6만 정도이고, 그들이 평양으로 내려온다면 사상 최대의 살육전(the 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했다. 그러나 단 한 달 만에 상황은 뒤바뀌었다. 북한에 웅크리고 있던 중공군은 총 30만 명이었고, 해병1사단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미군은 장진호에서 사상 최대 살육전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1950년 9월 인천에서 노르망디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군사적 성과를 달성한 맥아더는 딱 두 달 만에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중공군 2차공세)를 조국에 안겼다. 맥아더 전기를 쓴 작가 제임스 엘먼은 “제트기·전차·중포·전략폭격기를 가진 고도로 기계화된 군대가, 보급도 덜 받고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덜 무장된 군대에 패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중공군 2차공세는 맥아더의 과소평가에서 시작된 대형 참사였고, 맥아더에 대한 과대평가를 보여준 증거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맥아더의 활동은, 가끔 하네다 공항에 VIP를 보러 가는 것을 빼면, 식사 모임이나 식후 대화 정도가 전부였다. 혁명기념일에 소련 대사관, 국왕 생일에 영국 대사관, 바스티유 기념일에 프랑스 대사관을 갔지만, 현장 부대는 가지 않았다. 맥아더의 참모장은 당시 미군 준비 태세 부족의 이유를 ‘훈련 부족’이 아니라 ‘평화기 징병을 하지 않은 점’으로 돌렸다.”
(스탠리 웨인트라웁 '맥아더의 전쟁' 중에서)
제9면 임기응변: 노력하지 않았던 게으른 천재
공자는 나이 쉰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 예순에 귀가 순해졌으며(耳順),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50세(참모총장)에 천명과 같은 국가지도자의 명령을 어겼고, 60세(필리핀 총사령관)에 편한 얘기만 듣고자 참모들의 심기경호 속으로 숨었으며, 70세(한국전쟁 유엔군사령관)가 돼선 민주주의 법도인 문민통제 원칙을 수시로 무시했다.
맥아더는 분명 군인으로서 절륜한 재능을 갖춘 ‘역대급 장군’임에 분명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노력을 포기하면서부터 점점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변모해 갔다. 나이가 들수록 일선 병사들과 멀어졌고, 현장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걸러 들었으며, 자기 욕심과 실제 성과 사이의 괴리를 자꾸 언론 플레이로 메우려 했다.
평시에 맥아더는 적국 동태를 살피는 일에 소홀했고 앞으로 닥쳐올 분쟁이 어떤 모습일지를 예측하는 연구를 게을리했다. 일이 닥치면, 적이 쳐들어오면, 그제야 허둥지둥 대책을 마련하고 임기응변식 해법을 내놓았다. 그 임기응변이 범장(凡將)의 오랜 준비보다 분명 나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빠른 학습 능력 덕분에 전투를 거듭할수록 다른 장군들의 특기를 흡수해 자신만의 군사 전술을 계속 다듬어 나갔다. 태평양전쟁 전문가 리처드 프랭크는 “레너드 우드(전 필리핀 총독)에게 필리핀 방어체계 구축을 빌렸고, 부하 조지 케니(당시 5공군사령관)에게서 항공전, 대니얼 바비(남서태평양사령부 상륙군사령관)로부터 상륙전을 배워 항공·상륙전의 달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높은 지적 능력이나 군사적 천재성 등을 감안했을 때, 맥아더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전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아 적에게 먼저 승기를 먼저 내줬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게 맥아더만의 책임은 아니다. 전쟁 전 국방력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국방장관·합참의 책임이었고, 적의 선제공격을 몰랐던 것은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예하부대 준비 부족만큼은 전적으로 맥아더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이라면, 담당 지역 정세를 예민하게 파악하면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예하부대 훈련 수준을 높여 두었어야 했다. 맥아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태평양전쟁 직전 필리핀에선 ‘워싱턴이 장비를 주지 않는다’는 불평만 했을 뿐 자기 휘하 필리핀군에 대한 훈련을 소홀히 했다. 실전 훈련을 하지 않은 결과, 1941년 12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필리핀 병사들이 전투 시작부터 소총을 버리고 전장을 이탈하는 일이 속출했다.
한국전쟁 직전,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 소속 4개 사단 훈련 수준도 이와 다를 게 없었다. 장교들은 그나마 2차대전 경력자들이 많아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했으나, 대부분 2차대전 종전 후 입대한 병사들이 문제였다. 훈련을 통해 계속 실전 감각을 키우지 못한 결과, 한국전쟁 초반 북한군 포격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미군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맥아더의 임기응변이 통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윌리엄 딘의 24사단이 오산-금강-대전에서 결사 방어로 시간을 버는 사이, 일본에 있던 3개 사단(2·25·1기병사단)을 긴급 투입해 낙동강 교두보를 만들고, 미 본토에서 급파된 사단으로 반격을 하는 구상이었다. 이런 방어 계획은 예전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맥아더가 부랴부랴 만든 것이었는데, 실제 6·25 전쟁 초반부(1950년 9월 말까지) 전황은 맥아더 계획대로 흘러갔다.

맥아더는 군사작전만 임기응변으로 이끈 게 아니었다. 중요 보직에 사람을 쓸 때도 ‘즉흥적 용인술’이 잦았다. 6·25 전쟁 발발 후 딘의 24사단을 한반도에 선발 부대로 보낸 이유도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4사단은 당시 일본 주둔 4개 미 육군 사단 중 전투력이 가장 약했고, 한국에서 보여 준 전투 지휘의 수준을 볼 때 딘 역시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맥아더가 1945년 8월 존 리드 하지 중장을 38선 이남 군정사령관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맥아더가 하지를 선택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하지의 24군단이 한반도에서 가까운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는 군인으로선 능력 있고 용맹한 지휘관이었지만, 높은 정무감각이 요구되는 군정사령관으로선 최악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들을 상대로 강압적인 포고령을 발령하더니, 국내 정치 세력과의 협조나 공조를 아예 거부했다. 인구 1,600만 명 나라를 함부로 예하부대 다루듯이 관리한 인물이 바로 하지다.
당시 군정통치에 어려움을 겪던 하지는 맥아더에게 “조언을 달라”거나 “한국 내 정치적 내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며 SOS를 보냈다. 그러나 맥아더는 “나는 지금 바쁘고 일본의 일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답신했다. 하지의 군정통치는 한국 입장에선 참사였다. 맥아더의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다.
더 나아가 하지에 대한 부분은 맥아더가 정치와 행정을 군사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뒤이어 나올 정치군인 맥아더의 실체, 민주적 통제를 거부했던 맥아더의 위험한 정치관도 결국 이러한 군사 우월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 맥아더의 정치군인, 내로남불, 선사후공을 다룬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2월 19일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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