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개화지조’, 소재 노수신


- 벽파정에서 김정, 송인수를 만나다
을사사화(1545)로 진도에서만 19년간 유배 생활을 한 후 선조 대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분이 있다. 소재 노수신이 그다. 당시 한반도의 끝자락 진도는 제주도, 흑산도와 더불어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중종 대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진도로 유배된 사람이 300여 명이나 보인다.


노수신은 벽파정에 올라 수많은 편액 속에서 낯익은 두 분의 시를 발견한다. 충암 김정(金淨, 1486-1521)과 규암 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시였다.
김정의 시 ‘벽파를 건너며 읊다(渡碧波口號)’는 다음과 같다.
“우주는 예로부터 심원하나(宇宙由來遠)/ 인생은 원래부터 떠다니는 삶이라네(人生本自浮)/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이제 떠나면(扁舟從此去)/ 고개를 돌려 보아도 아주 아득하겠지(回首政悠悠)”
1519년(중종 14) 조광조가 사사된 기묘사화 당시 금산으로 유배된 김정은 1520년(중종 15) 5월 유배지가 진도로 바뀌었고, 그해 여름 제주도로 또 바뀐다.
노수신이 본 김정의 시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벽파진을 떠나면서 쓴 시다. 제주도는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수도, 영영 육지 땅을 밟지 못할 수도 있는 죽음의 유배지였다. 김정이 벽파진을 떠나 제주로 가면서 느낀 인생의 소회가 참으로 가슴 찡하다. 실제 김정은 육지 땅을 밟지 못하고 1521년(중종 16) 제주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김정이 벽파진을 떠난 지 22년 후,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벽파정에 걸린 김정의 시를 보고, ‘충암 김정의 진도 벽파정 시에 차운해’(珍島碧波亭 借忠岩金淨韻)라는 시 한 수를 읊어 건다.
“외로운 충신 곧바름 눈부시게(孤忠輕性明)/ 오로지 노 끝에 매여 파도에 부침하네(端棹任沈浮)/ 해는 저물어 찬란한 섬 멀고 아득하여(日落芳洲遠)/ 끝없이 떠도는 혼을 부르노라(招魂意轉悠)”
구천에 떠돌던 김정의 혼을 불렀던 송인수도 전라도 관찰사를 마친 3년 후인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약을 받는다. 선배 사림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였다. 자신의 모습일 것 같아, 노수신의 가슴은 덜컹 내려앉고 두 다리는 휘청거린다.
최고의 시인이었던 노수신, 그도 ‘김정과 김정의 시에 차운한 송인수의 시에 답해’(爲答碧波亭詩)라는 시를 남긴다.
“두 공은 천상에 있고(二公天上在)/ 나그네 홀로 바다 가운데 떠 있네(孤客海中浮)/ 이 아침까지 목숨을 이었으니(幸緩今朝死)/ 앞날이 오히려 절로 유유하네(前導尙自悠)”
노수신의 시에 나오는 ‘두 공’(二公)은 충암 김정과 규암 송인수를, 그리고 ‘홀로 바다 가운데 떠 있네’의 주인은 노수신 자신이다. 앞서 죽임을 당한 두 선배의 모습을 떠올리며, 노수신은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앞날이 오히려 절로 유유하네’라고 읊고 있다.
- 진도에 유배되다
진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한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1515년(중종 10)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난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암실(暗室)·여지노인(茹芝老人)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이연경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스승의 딸과 결혼해 이연경의 사위가 된다. 15살이 되기 전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문장가로서 노수신은 천년 안에 비교되는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1543년(중종 38)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정6품 성균관 전적에 임명된다. 이듬해인 1544년(중종 39)에는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정6품 시강원 사서가 된다. 이때 이황과 함께 세자(인종)에게 강론하면서 서로의 도학 이론을 인정하고 친구가 된다.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정권을 장악하고 다수의 사림이 등용되는데, 이때 노수신은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핵심 부서인 사간원 정언이 된다. 그리고 정황과 함께 우의정 이기(李�A)를 탄핵해 파직시킨다. 당시 조정은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대윤과 소윤으로 불리며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노수신이 탄핵해 파직시킨 이기는 윤원형과 함께 소윤의 핵심 인물이었다.
노수신은 이후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정랑이 돼 사림을 대거 등용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12살 명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문정왕후의 오라비였던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하게 됐고, 인종 대에 등용된 대윤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한다.
이를 역사는 ‘을사사화’라 부른다. 그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인물이 이기였고, 그래서 당대 사림들은 윤원형과 이기를 이흉(二兇)이라 불렀다.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 10명이 죽임을 당했고, 이기를 탄핵하고 사림들을 대거 등용한 노수신도 파직된 후 순천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1547년(명종 2) 9월,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글이 적힌 익명의 벽서(壁書)가 양재역에 붙는데, 이가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벽서에 나오는 ‘여주’는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를 가리킨다. 이 사건으로 이미 언급된 송인수와 이약빙 등이 죽임을 당하고, 노수신은 가중 처벌돼 유배지가 순천에서 진도로 바뀐다. 노수신이 진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한 연유다.
- 선조 대에 승승장구하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노수신은 유배지가 괴산으로 옮겨진 후 선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조정에 중용된다.
‘20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발탁해 중용해야 한다’는 고봉 기대승의 건의를 선조가 받아들인 것이다.
노수신은 다시 등용돼 정3품 대사간과 정2품 대제학을 지냈으며, 우의정과 좌의정에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역임한다.
노수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두터웠다. 선조는 살아생전 유성룡·이이보다 더 가까이 두고자 했던 인물이 노수신이었다.
선조는 “경(노수신)은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이요, 학문은 정자와 주자의 맥을 전하고, 도는 유림의 종주가 되었도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1588년(선조 21) 영의정에서 사임한 이듬해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발발했는데, 그 정여립을 추천한 분이 노수신이었다. 노수신이 연루돼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지만, 선조는 중추부판사라는 명예직을 파직하는 선에서 그를 보호했다.
1590년(선조 23), 노수신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향년 76세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하찮은 일에는 흐릿하여 끝내 누가 된 적이 있지만, 큰 뜻에는 분명하여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다”라는 ‘암실선생자명’이라는 묘비명을 스스로 짓는다. 숙종은 노수신에게 문의(文懿)란 시호를 내린다. 후에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바뀐다.
- 진도 ‘개화지조’로 불리다
노수신이 진도 어디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유배 기간 대부분을 거제 갯가(지산면 거제리)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안치마을(지산면 안치리)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절해고도 진도에서의 유배 생활은 힘에 부쳤다. 금수저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방 수령마저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진도군수 홍인록은 당시 권력자였던 소윤 일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수신을 박해했다. 죄인은 호의호식해서는 안 된다며 쌀밥 대신 좁쌀밥만을 먹게 했고, 따뜻하게 살면 안 된다고 이불마저 빼앗아 버리는 등 행패를 부린다.
그런 홍인록을 노수신이 중앙에서 잘 나갈 때 또 만난다. 홍인록이 탄핵당하자, 노수신은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을 법도 했지만, 오히려 탄핵을 무마시키고 풍천군수로 승진시킨다. 노수신의 인간성이 어떤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옥을 지어 ‘내가 내 책을 읽으니 병에서 깬 듯하다’는 뜻의 ‘소재’(蘇齋)라 이름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노수신은 퇴계 이황 등 당시 주류학자들과 서신을 교류하면서도 양명학을 수용하여 자신의 세계관도 구축한다. 그 무렵 우씨 부인과 살면서 노계래, 노계난, 노계후 등 세 아들도 낳는다. 이 중 셋째인 노계후의 후손들이 지금 안치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노수신은 유배 시절 초기, 그에게 가르침을 청한 유생들을 모두 물리친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진도향교 석전제와 이안제 등에 참석하며 지역 유림과 적극 교류한다.
석전제(釋奠祭)는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서 공자와 그 제자 등 유교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를, 이안제(移安祭)는 불가피한 사유로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긴 뒤 행하는 유교 의례를 말한다.
영암의 최경창, 해남의 백광훈, 홍성의 이달 등이 찾아와 시를 배웠고, 진도의 유림들도 몰려들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진도 사람들을 개화(계몽)시키는 데도 힘쓴다. 그중 하나가 혼례제도였다.
진도에는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밤중에 보쌈하는 풍습이 있었다. 노수신은 왜구들의 나쁜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던 진도의 백성들에게 중매를 통한 혼인 예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천23수에 이르는 한시도 짓는다.



노수신을 모셨던 ‘봉암서원’도 복원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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