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사·구슬로 빚은 '입는 조각'… 한국의 美 담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6. 2. 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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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예박물관 금기숙 특별전
감꽃에 실 꿰 목걸이 만든 기억
평창 '눈꽃요정' 옷으로 이어져
한복 선 현대적 해석으로 호평
작품 56점·자료 485점 기증해
"옷, 패션 넘어 조형예술 확장"
금기숙 작가가 철사와 비즈, 직물로 제작한 '연화드레스(2025)'. 작가는 철사, 비즈, 호박, 단추 등 이질적이고 비전통적인 재료를 결합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서울공예박물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하얀 눈꽃 요정들이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각국 선수단이 입장할 때 앞장선 피켓 요원들의 의상은 동화 속 요정을 떠올리게 했다. 단아한 목선과 족두리를 연상케 하는 화관은 한복을 연상시켰고, 반짝이는 구슬을 엮어 흰 눈이 맺힌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눈꽃 요정' 의상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금기숙 작가(74) 기증 특별전 '꿈꾸고, 춤추며, 깨닫는(Dancing, Dreaming, Enlightening)'을 통해서다. 전시는 옷을 입는 대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예술과 조형, 공간으로 확장해온 패션아트 선구자인 금 작가의 작업 세계를 집약해 보여준다.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평창동계올림픽 의상감독으로 개회식 의상을 준비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과 긴장 속에서 구슬을 꿰던 순간, '내가 이 짓을 왜 하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는 감꽃에 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던 소녀였다. 두꺼운 무명실에 통통한 감꽃을 꿰어 어머니에게 가져가면, 어머니는 "잘했다"며 실을 묶어 목에 걸어줬다. 다시 꿰어 가면 또 하나를 걸어줬다. 그는 여러 개의 감꽃 목걸이를 건 채 꽃을 뜯어먹기도 했다. 작가는 "그 기억이 떠오르자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완성된 '눈꽃 요정' 의상은 한복의 선과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세계 무대에 한국적 조형미를 각인시켰다. 이번 전시는 해당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가 의상을 입는 대상에서 조형예술, 설치와 환경 예술로 확장한 과정을 따라간다.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명예교수인 금기숙은 1990년대 패션과 순수미술의 경계가 뚜렷하던 시기, 옷을 조형과 설치로 확장하며 국내에 패션아트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작가다. 그는 의상을 독립된 조형 언어로 다뤄왔다. 그는 종이와 직물에서 출발해 철사, 구슬, 노방, 스팽글, 폐기물에 이르기까지 재료의 경계를 넓히며 '입는 조각(Wearable Art)'이라는 영역을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0년대 직물과 철사, 비즈를 활용한 초기 실험작부터 의상이 인체를 벗어나 공간 전체를 구성하는 조형 언어로 확장된 작업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의 시작부, 어둠 속에 놓인 '백매' 드레스가 관람객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는다. 철사와 비즈로 엮은 드레스는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옷을 넘어선 조형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벽면과 공간에 부조와 설치 형태로 배치된 작품들은 패션아트가 옷을 넘어 공간을 구성하는 예술로 확장된 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1996년부터 업사이클링 작업을 지속해왔다. 꽃다발을 묶는 철사, 버려진 한복 자투리 천이 작품의 재료가 됐다. 1세대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의 작업실에서 얻은 천도 그중 하나다. 그는 "이리자 선생님 작업실에서 남은 천을 보고 너무 아까워서 '갖고 놀아볼게요' 하며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투리 천을 리본 묶듯 엮어 드레스로 재탄생시켰다. 전통 복식에서 출발한 재료는 현대적 조형으로 변모했다.

'동색 저고리(2016)'

업사이클링 작업은 '물고기' '물방울' 설치 작품으로도 확장됐다. 박물관 1층 로비를 채우고 있는 대형 설치물이다. 폐플라스틱 빨대와 폐스티로폼, 쿠팡 새벽배송에 사용되고 버려진 비닐까지 재료로 활용해 물방울과 물고기 형상을 만들었다. 작가는 생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작업에 담았다. "같은 생명인데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쟤는 물고기로 태어나 우리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한복을 재해석한 작업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의상 전시를 준비하며 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궁녀들이 입었을 당의의 선과 구조를 떠올리며 한복을 조형 언어로 풀어냈다. 이 같은 탐구는 저고리, 학창의(조선시대 사대부가 입던 옷) 등 다양한 한복 작업으로 확장됐다.

작가는 관객이 작품 앞에서 잠시 현실을 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예술의 기능은 잠깐 환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는 힘이 예술"이라며 "제 작품을 보고 그런 걸 느낀다면 감사할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전시장 곳곳에서는 투명하게 눈부신 드레스 앞에서 탄성을 내뱉는 관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작품 56점과 아카이브 자료 485점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 규모는 약 13억1000만원에 달한다. 작가는 "박물관에 패션아트 담론이 형성된다면, 우리의 문화 다양성도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입소문을 타며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평일 낮에도 가족 단위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재료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난 10일 기준 관람객 수는 37만명을 넘어섰다. 2021년 11월 박물관 개관 이후 역대 최다 방문 기록이다. 박물관은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과 기간 연장 요청에 힘입어 전시를 일주일 연장 운영하기로 했다. 전시는 무료. 3월 22일까지 계속된다.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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