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비극의 문법으로 빚은 명품 K판타지 뮤지컬 ‘몽유도원’

이정국 기자 2026. 2. 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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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

대개 고전에서 비극은 언제나 가장 인간적인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할 것’이라는 신탁을 피하려 고향을 떠난다. 그러나 도망치는 선택이 운명을 바꾸진 못했다. 길에서 낯선 이를 죽이고, 그가 왕좌에 오르는 순간 비극은 이미 성립한다. 진실을 끝까지 확인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파국의 문을 열어젖히고, 그는 스스로 눈을 찌르며 파국을 맞는다.

이렇듯 고전 속에서 비극은 대개 ‘인간의 악마성’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 윤리 같은 순수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뮤지컬 ‘몽유도원’도 그 오래된 비극의 궤도를 탄다. 사랑을 얻으려 한 선택이 사랑을 망치고, 한 사람의 욕망이 공동체의 질서를 흔든다. 다만 이 작품은 ‘백제 판타지’라는 미학으로 고전적 비극을 화려하게 빚어낸다.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2002년 초연 뒤 24년 만에 재연 막을 올린 ‘몽유도원’(2월22일까지)은 삼국사기 ‘도미전’을 모티프로 한 고 최인호의 1995년 소설 ‘몽유도원도’를 원작으로 한다. 제작사는 ‘명성황후’ ‘영웅’ 등 한국 창작 뮤지컬의 큰 줄기를 만들어온 에이콤이다.

이번 작품은 세계 진출을 염두에 둔, 사실상 오리지널 초연 프로덕션으로 설계됐다. 윤호진 연출은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도 통할 보편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이라며 “한국 역사나 전통 설화에 익숙지 않은 해외 관객도 서사에 공감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2028년 브로드웨이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백제의 왕 여경(민우혁·김주택)은 꿈에서 본 여인 아랑(하윤주·유리아)을 잊지 못한다. 왕비 자리를 둘러싼 귀족들의 다툼을 막기 위해 “어떤 여인도 곁에 두지 않겠다”던 다짐은 꿈 하나에 무너지고, 그는 신하 향실(서영주·전재홍)에게 여인을 찾아오라 명한다. 그러나 아랑은 이미 목지국 후손들의 지도자 도미(이충주·김성식·윤제원)와 혼인한 뒤다. 권력은 사랑을 소유하려 들고, 아랑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상처 내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승자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결말은 고전 비극의 냉정함을 그대로 품는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하이라이트인 바둑 대결 장면. 에이콤 제공

이 작품의 설득력은 ‘설명’보다 ‘체감’에 있다.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결 장면은 그 정점을 보여준다. 흑과 백의 돌이 오가는 순간, 바둑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은유로 확장된다. 돌을 내려놓는 동작은 칼을 뽑는 것처럼 날카롭고, 흑백으로 분절된 군무는 권력의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 논리로 움직이는지를 한눈에 각인시킨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몽유도원’의 냉혹한 비극을 절감하게 된다.

시각적 요소는 ‘동양적 색채’와 ‘여백의 미’로 정리된다. 수묵 영상디자이너 탁영환이 무대 디자인을 맡아 수묵 애니메이션으로 무대를 한 폭의 산수화처럼 만들고, 비주얼 디렉팅은 ‘웃는 남자’ ‘데스노트’ 등에 참여한 이모셔널씨어터가 맡아 현실과 꿈의 세계를 오가는 흐름을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무대 뒤 스크린에 번지는 먹의 농담과 여백은 단지 아름다운 배경이 아니라, 사건의 방향과 인물의 심리를 대신 말하는 언어가 된다.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

음악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영웅’의 음악을 맡았던 오상준 작곡가와 김문정 음악감독이 국악기와 서양 오케스트라를 접목한 곡들을 선보이며, 작품 전체는 국악·전자음악의 결합을 넘어 오페라적 호흡, 록의 추진력, 발라드의 감정선까지 폭넓게 가로지른다.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수행하는 배우들의 역량이 돋보인다. 오페라·국악·록·발라드 등 서로 다른 결의 노래를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기량이야말로, 이 작품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 이유다.

윤홍선 에이콤 대표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우리의 신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힌 대목은 설득력을 얻는다. 설화의 비극 구조 위에 수묵의 미학, 흑백의 군무, 국악과 오케스트라의 결합이 정확히 맞물리며, ‘한국적인 것’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보편적 감동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된다.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

오래 기다린 만큼,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작품이다. 마침내 제대로 된 케이(K)판타지 뮤지컬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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