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문학을 말하다] 디기탈리스

주혜성 기자 2026. 2. 1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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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공론×한국약사문인회] 김초성

약사공론은 약사문인회와 손을 맞잡고, 약사의 삶 속에 스며 있는 감성과 사유를 문학의 언어로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코너에서는 시와 수필을 통해 약사들이 마음속에 품은 이야기들이 조용히 피어납니다.

한 편의 글이 한 알의 약처럼, 독자 여러분의 하루에 따뜻한 쉼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빈센트 반 고흐 [의사 가셰의 초상] 1890. 캔버스에 유채│67×56cm│개인소장. 미국

                                   

"제발 부탁한다. 사회에 나가서도 최소한 이것만은 잊어버리지 마라." 

학점 짜기로 유명한 Y교수는 제때 기억하지 못해서 체면 잃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간절히 당부하셨다. 

머리 속에 입력해 두어야 할 것이 기백 가지가 된다. 약초 하나 마다에 갖고 있는 생약명 학명과 성분 약효 원산지 등을 외우다 보면 혼돈의 세계 속을 넘나들기 일쑤다. 하고 많은 약초 중에 왜 하필 디기탈리스인가. 

디기톡신, 디곡신, 강심 이뇨 배당체~. 학부시절에 그저 실체를 모르고 어렵기만 했던 것들을 강제로 외우려면 골머리가 아팠다. 그 덕분에 수십 년이 지나도록 디기탈리스는 뇌 속에 진한 글씨로 각인되었다. 인기도 별로 없던 그 교수님이 나도 모르게 가슴 속 한구석에 들어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느 여름 날, 수목원 숲길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난 너무 반가워 소스라칠 뻔하였다. Y교수의 말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평생 꽃 이름 하나로 이렇게 마음을 사로잡을 줄이야. 조롱조롱 매달린 꽃 속에서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저 안쪽에서는 군락을 이룬 디기탈리스들의 허밍 코러스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들은 올곧게 곧추서서 나를 환영해 주었다. 디기탈리스 꽃으로 슾속에 불 밝히어 하양 보라 삘깅 분홍 다양하게 어우러진 종들이 꽃으로 환생한 듯 황홀했다. 경황없는 두근거림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처음 상면한 저 꽃을 어떡하면 우리 정원에 모셔올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숨길 수 없는 속성이 꿈틀거렸다. 어쩌자고 탐심이 발동했는지 민망스럽기만 하다. 디기탈리스! 네가 그곳에 그대로 있는 게 오히려 더 아름답고 신비로워. 마침 씨앗을 맺지 않았을 때라서 아쉬움으로 마음 달랜다.

본래 남서부 유럽이 원산지인 디기탈리스는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아니다. 근래는 온난화 탓인지 우리나라에도 귀화해서 어쩌다 눈에 띈다. 약간 크고 고운 낱 송이는 참깨꽃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접시꽃처럼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다. 구월 쯤 파종을 하면 다음 해에 여러 색깔의 꽃을 볼 수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꽃과 잎새, 줄기와 뿌리 전초에 모두 독성이 있으니 약효와 중독의 양면성을 지닌 조심스러운 약초다. 초식동물들은 쓴맛을 지닌 이 약초를 어찌 그리 잘도 알고 먹지 않을까. 신통하다. 쓴맛이 미리 보호작용을 해준 것일까. 

뇌전증(간질)과 조울증 두통에 시달렸다던 화가 고흐. 그의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디기탈리스 이름을 밝혀준 구절이 있다. 그가 정신병원에서 상용했던 약이 바로 디기탈리스에서 추출한 디기톡신이었다. '의사 가셰의 초상'이란 유명세를 탄 그의 작품 속 책상 위에는 보라색 디기탈리스가 별나게 돋보인다. 닥터 가셰의 이지러진 얼굴과 몸짓을 통해서 디기탈리스의 독성에 의한 고통을 대신 알리려는 메시지라 여겨진다. 후세의 논리대로 그가 만약 메니에르증후군을 겸해서 앓았다면 그래도 디기탈리스를 과용했을까. 그가 즐겨 마시던 압생트로 알콜 중독증상까지 이어졌으니 황색시증과 정신착란은 더 심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뇌 속의 예술혼과 생이 애틋했지만 어찌 보면 그리 불행하기만 한 화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좋아하는 그림을 끊임없이 그리고 새로운 구상에 몰입했던 순간들은 오히려 행복했으리라. 그의 창작 의욕은 가히 짐작하기가 어렵다. 불과 십여 년에 구백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을 정도니 습작을 더하면 거의 하루 이틀에 한 작품씩 완성했다는 기록이 된다. 그림에 미치고 도취되지 않고서야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올까. 그는 가난한 화가, 배고픈 화가가 아니었다. 내면은 항상 넘치는 감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열정이 넘쳤으니. 그림에 몰두하면서도 쓰고 읽기를 멈추지 않는 앎이 깊은 문학 애호가이기도 했다. 소재를 두고 생각과 말을 빛과 색채로 그리지 않으면 산화해버릴 것 같았을는지도. 넘치는 열정을 다 뿜어내지 못해 조울증, 황시증, 알콜중독 등을 빌어 그를 정신분열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즐겨 표현하던 노랑 색채는 변화를 원하는 희망의 상징이었고 물결치듯 흔들리는 풍경들은 현기증을 이겨 내려는 흔적일 것이다. 거기에 디기탈리스가 동행하고 있었다. 

  18C에 유럽에서부터 디기탈리스는 심장질환 (울혈성심장기능 심장박동조절 강심), 고혈압, 이뇨 조울증 간질 등에 주로 쓰여 왔다. 약효만큼 독성도 강한 디기탈리스. 부작용으로는 시각장애 황색시증, 어지럼증 부정맥 이명 경련 구토 설사 심장마비 등이 있다. 요주의 전문약초라서 다룰 때는 각별히 긴장해야 한다. 일반사람은 아예 관상용으로만 꽃을 즐겨 보는 게 좋을 일이다. 

지금까지도 심장질환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중요한 약재 디기탈리스. 나는 '제발 잊지 말라' 하시던 그 교수님의 부탁을 충실히 지켜왔던가. 

아. 디기탈리스!   

*디기탈리스 digitalis purpuria

- 분포지: 유럽 아프리카동북부 발칸반도 중앙아시아 항가리

- 약명별명: 모지황 양지황 심장풀

- 효능: 강심 이뇨 울혈성심부전 부종 만성판막증 뇌전증.

- 부작용: 황색시증 부정맥빈맥 경련 오심구토 심장마비 현훈 시각장애 

김초성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2005년<에세이스트>를 통해 등단

부경문학상,부산문정문학상 대상 수상

부산수필문인협회,부경문인협회원.

수필집<풀별 일지>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