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시장 ’24시간 시계' 멈춰… 손님도 상인도 떠난다

구아모 기자 2026. 2. 1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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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공실률 20% 육박
지난 6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의 한 숙녀복 상가. 문 닫은 점포가 많아 썰렁한 모습이다. 점포 10곳 중 5곳은 텅 비어 있었다. 지나가는 손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장경식 기자

‘밤 11시 개점, 오후 1시 폐점.’ 지난 4일 낮에 찾은 서울 남대문시장의 한 수입 도매 상가 출입문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오전 5시쯤 다시 찾았더니 점포 140여 곳 중 불을 밝힌 곳은 네 곳뿐이었다. 노란 형광등이 비추는 복도엔 잠든 상인들의 코 고는 소리가 나직이 퍼졌다. 사람이 없는 한 점포는 매대 위에 놓인 ‘휴식 중, 전화 주세요’라고 적힌 메모지가 아직 주인이 있는 상점임을 알려줬다.

“어머니가 처음 가게를 열었던 1989년엔 시장 바닥이 손님으로 꽉 차서 인파에 떠밀려 갈 정도였는데….” 남대문시장 수입 도매 상가에서 37년간 의류와 담요·커튼을 수입해 팔아온 김영미(59)씨가 텅 빈 복도를 보면서 말했다. 김씨는 “토요일엔 문 여는 가게가 전체 140여 곳 중 10곳 정도로 줄었다”며 “주말엔 손님은커녕 상인 얼굴 보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래픽=이진영

서울의 대표적인 도매 시장인 남대문시장. 6·25 전쟁 직후 각종 구호·군용 물자가 흘러나와 유통되는 통로였다. 1970~1990년대 전국 팔도의 보따리상들이 매일 새벽 상경해 이곳으로 모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하루 고객이 60만명을 넘어 한때 ‘동양 최대 시장’으로 불렸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남대문시장은 ‘못 구하는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후(戰後) 서울 경제를 움직이는 거대한 상업 중심지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4일부터 일주일간 찾은 남대문시장에선 과거의 활력을 찾기 어려웠다. 3.3㎡(1평) 남짓한 점포 한 곳에 1억~2억원을 호가하던 권리금도 사라졌다. 여성복 장사를 하는 박영심(73)씨는 “30년 전엔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을 권리금으로 주고 들어왔는데, 지금은 권리금은 고사하고 보증금이라도 받고 나가고 싶어 하는 상인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남대문시장 상인회에 따르면 평균 공실률은 17.8% 수준. 그러나 본지가 숙녀복 등 비인기 상가 세 곳을 돌아봤더니 공실률이 50~75%까지 올랐다.

남대문시장 수입품을 파는 한 상가의 지하 1층 모습. 이곳은 원래 점포가 130개 있었는지만, 지금은 35개만 남아있다. /지혜진 기자

남대문시장은 일반 소비자와 근처 소매상들이 점포를 직접 방문해 물품을 구매하는 ‘생활 밀착형’ 성격도 강했다. 몰려든 손님에게 직접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준다고 해서 ‘봉지떼기’라는 말도 유행했다. 전국 단위 대량 도매 중심의 동대문시장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50년째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점포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손님이 많을 때는 직원만 6명이었고 가게가 24시간 돌아갔다”며 “새벽마다 서울 근교에서 온 손님들이 산 물건을 봉지에 담아주느라 손끝이 갈라졌다”고 했다. 30년째 남대문시장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고영신(70)씨는 “러시아, 일본에서 온 바이어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떼어가던 시절엔 달러를 긁어모았다”고 했다.

손님이 끊이지 않던 남대문시장이 침체에 빠져든 건 온라인 쇼핑 영향이 크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같은 ‘저가 중국산 공습’도 남대문시장을 한가하게 만들었다. 상권 노후화와 주차장 부족, 정찰제 미시행 등으로 인한 젊은 관광객 이탈도 남대문시장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 4일 오후 5시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남성복 매장을 운영하는 상인이 천막을 두르며 가게 문을 닫고 있다. 70대인 이 남성 상인은 “예전에는 24시간 영업했는데, 요즘은 장사가 안 돼 오후 4시만 돼도 가게 문을 일찍 닫는다”고 말했다. /지혜진 기자

남대문시장이 침체에 접어들면서 개별 상가 운영회도 잇따라 무너지고 있다. 과거엔 운영회 간부를 뽑는 선거철마다 유세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운영회 간부직은 ‘기피직’이 됐다. 월 회비 1만~2만원을 내는 것을 버거워하는 상인도 늘었다. 남대문시장은 판매 품목별로 상인회나 운영회가 있다. 그런데 최근 수년간 남대문 운영회 5곳이 해체됐다. 남대문시장을 관리하는 남대문시장주식회사의 직원 수는 88 서울 올림픽 때 70여 명 수준이었지만 최근엔 15명 수준으로 줄었다.

시장을 지키려는 상인들의 고군분투도 계속되고 있다. 남대문시장 상인회는 최근 젊은 층과 관광객 유입을 위해 라이브 커머스(실시간 방송 판매) 방송 등 디지털 판매 채널 확대를 시도하고, 상인 대상 디지털 마케팅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문남엽 남대문시장 상인회장은 “전통적 방식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공감대 아래 AI(인공지능) 기반 물류 서비스 도입을 추진하는 등 현대화된 시장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가는 중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상가들끼리 정해 놓은 ‘필수 출근 요일’이나 ‘근무 시간’ 규칙도 깨진 지 오래다. 지난 6일 오후 2시 남대문시장을 찾았더니 손님들이 텅 빈 상가를 보고 발길을 돌릴까 봐, 출근한 상인들이 옆집 빈 매대에 자기네 물건을 쌓아두고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자 33년간 숙녀복을 팔고 있는 이정애(66)씨가 외쳤다. “(장사) 접고 들어갑시다.” 약속이나 한 듯 곳곳에서 셔터 내려가는 금속음이 복도 공기를 갈랐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남아 있는 남대문시장 점포 수는 여전히 1만개가 넘는다”며 “어떻게 자생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유통 구조 개선 등 생존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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