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미의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 미군정이 ‘한반도 점령용’이란 수정주의 역사관, 최근 사료와 어긋나
일본이 점령한 지역 해방을 위한
군사 작전의 일부로 미군정 설치
사회질서 유지와 난민구호 목적
소련 봉쇄용으로 단정하면 안 돼
해방 전후사를 둘러싼 해석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으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일제가 1940년대 들어 조선어로 발간되는 신문들을 폐간하고 출판 활동을 탄압하면서 조선인의 시각이 담긴 당대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종전, 미군정과 정부 수립 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해방 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편향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재미 학자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미군은 한반도에서 점령군이었는가, 해방군이었는가?”
이 질문은 1980년대 한국 현대사 연구 붐과 함께 많은 학자가 던진 핵심 의문이다. 그 답을 찾을 때 미국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큰 영향을 끼쳤다. 커밍스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6·25전쟁은 미군정의 냉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통해 한국 진보 세력의 한·미 관계 인식을 바꿨다. 그렇다면 미군은 과연 점령군이었을까? 미국은 구체적으로 언제, 왜 한반도에 미군정을 실시하고자 했을까?
커밍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탁 통치 구상과 미군정 실시를 미국 내에 존재하던 상반된 노선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했다. 루스벨트는 신탁 통치를 통해 소련 등 강대국과 협조해 한국 독립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제주의적 노선을 취하고 있었는데, 1943년쯤부터 국무성 내부에서 소련의 의도를 의심하며 냉전적 시각에서 미국의 국익을 추구하려는 관료들이 부상했다고 봤다. 이들이 1944년 이후 한반도에 대한 미군의 직접 점령을 계획했고, 루스벨트 사망(1945년 4월 12일) 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커밍스는 남한 미군정 실시를 미국이 2차 대전 후 최초로 대소(對蘇) 봉쇄 정책을 구현한 사례로 평가했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료들과 연구 동향을 종합할 때, 커밍스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 우선 미 국무성은 1945년 9월 초 한반도 군정 실시 이후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할 때까지 소련과 협조 노선을 폐기한 적이 없다. 주한 미군 사령관 존 하지의 소련 군정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국무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군정 설치는 1943년 중반부터 전반적인 종전 계획의 일부로 검토했는데, 그 증거가 미 육군과 국무성 사료에 명확히 드러난다.

◇종전을 대비한 미국의 계획과 군정
미국은 전쟁의 최종 단계에서 추축국 점령 시 발생할 수 있는 난민의 대규모 이동과 구호 문제 등을 통제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점령 작전이 유럽과 아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선의 후방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사회 혼란, 질병 및 적대 세력의 교란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점령지에서 일시적으로 군사 정부를 운영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1943년 전반기 내내 미국 영토 밖에서 미군이 군사 정부를 설치하는 법률적 근거와 함께 군정 운영의 목표와 원칙을 검토했다.
이런 논의가 추축국 패망에 대한 본격적 준비로 전환된 것은 1943년 후반기의 일이다. 1943년 11월 10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육군에 “독일 패망에 대비해 대규모 민간 구호 물자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정 설치 문제와 함께 이 임무를 미 육군부의 민간행정국(The Civil Affairs Division)이 담당했다.
◇한반도에서 미군정 실시 계획
민간행정국은 유럽과 아시아 점령지에서 군정을 어떤 원칙으로 운영할지 100여 항목에 이르는 가이드라인을 작성했다. 한반도 군정도 이 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민간행정국은 미군이 주도하는 군정은 추축국이 했던 제국주의적 점령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점을 군정 요원들에게 주지시켰다. 법률적으로 군정은 승전국의 권리 행사 차원이 아니라, ‘군사 작전 지역에서 사회 질서 유지와 민간인 보호라는 국제법상 의무 수행 조직’으로 규정했다.

민간행정국을 이끈 사람은 존 힐더링 장군이었다. 그는 1946년 전역 후엔 국무성 점령 지역 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Occupied Area)로 일했다. 한국의 미군정도 민간행정국장부터 국무성 차관보 시절까지 힐더링의 소관이라, 관련 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등장한다.
1943년 8월 9일 힐더링이 작성한 자료에는 아시아 전선에서 중국, 한국,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타이,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일본 등을 미군의 점령 및 군정 준비 대상지로 명시했다. 군정 실시 목표는 지역에 따라 용어가 다를 수 있으나 대체로 이렇게 규정했다. “①해당 지역 민중을 전쟁을 초래한 체제에서 분리하고, ②해당 지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회복시키며, ③해당 지역을 추축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④이후 작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안정적인 정부를 유지한다.”
◇수정주의적 해석의 편파성 벗어나야
민간행정국 자료는 군정 실시 여부와 망명 정부의 군정 참여 시기 및 범위는 추후에 결정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후 미군이 아시아에서 실제로 점령을 준비한 지역은 대만, 한국, 필리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일본의 위임통치령 남양군도, 일본 본토였다. 미국은 육군부와 해군부에서 파견된 요원들을 포함해 ‘난민 이동과 정착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 지역의 지리와 역사, 인구 등에 대한 정보와 군사 작전 시 권고 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만은 원래 미군이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으로 변경됐다. 한국에 대한 보고서는 1944년 10월 말 완성돼 ‘한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난민 그룹’<<b>사진>이라는 제목으로 미 군부와 국무성 관련자들 사이에 회람됐다.

한반도에서 미군정 실시는 유럽 점령 정책과 같은 종전 계획의 일부였다. 따라서 군정 실시를 단순히 대소 봉쇄 정책의 일환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만주와 북한으로 군대를 신속히 투입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입장이 변화한 점 역시 수정주의 해석의 편파성을 벗어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 내 일본인들 패전 후 귀국, 미국이 사전에 기획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인들은 모두 어떻게 떠나게 되었을까? 패망의 결과로 보이지만 미국은 이 과정에도 정책적으로 개입했다. 국무성 내 ‘난민 이동과 정착에 관한 특별위원회’는 아시아의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일본인 숫자를 조사하고 이들의 수용 및 본국 귀환에 초점을 맞춰 난민 행정을 추진했다.

미국은 전후 난민 문제 처리에서 국적 원칙을 적용했다. 전쟁으로 거주지를 떠난 주민들(displaced people)과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본국 귀환을 거부하거나 국적이 없는 난민(refugees)을 분리해, 원칙적으로 대다수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부 또한 난민 귀환을 맡은 전담 기구를 조직해, 귀환자들을 조선인·중국인·일본인 등 국적별로 구분하고 구호 조치와 교통편을 제공했다.
국적에 따른 귀환 정책은 조선에 정착한 중국인 혹은 재일 조선인에게 거주 자격 문제로 혼란과 어려움을 초래했다. 하지만 일본인 거류민들이 19세기 말 이후 아시아 각지로 이주해 일본 식민주의의 팽창과 운영에 핵심 역할을 한 점을 감안하면, 이 정책은 일본 제국의 인적인 기반을 단기간에 해체하고 아시아 지역을 국민국가체제로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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