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얼굴’ 민화, 주류회화 될까

원근감 없는 책장(책거리) 그림이나 까치가 호랑이를 골려먹는 그림 따위로 기억되는 19~20세기 민화가 21세기 한국 미술판에 주요 장르로 끼어들 수 있을까.
2026년 벽두 한국 미술판에는 민화가 현대 회화로 확장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의가 화두로 떠오르는 중이다. 지난해 까치호랑이, 일월오봉도 등의 민화 도상을 따온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몰이와, 역시 민화 도상이나 전통 예술유산에서 모티브를 따온 박물관 문화상품(뮷즈) 열풍에 힘입어 이미 10만명 이상의 전통 민화 습작생과 창작 작가 층을 지닌 현대 민화계 관계자들이 미술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민화 재조명의 조짐을 서막처럼 알린 건 지난달 초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순방 때 시진핑 주석에게 준 선물 목록에 조선 말기에 그려졌던 장식용 민화 ‘기린도’가 포함된 사실을 외교부가 공표하면서부터였다. 외교부는 앞서 대통령실과 협의해 영험한 기운을 지닌 상상의 동물 기린을 그린 민화를 선물 목록에 올리기로 결정하고 지난 연말 중견 민화작가 엄재권씨에게 제작을 맡겼다. 엄 작가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19세기 전반 조선 왕실 소장 추정 ‘기린도’를 작가 특유의 필치로 재현하고 서명한 작품을 대통령 순방 직전 외교부에 납품했다고 한다. 어미 기린과 새끼 기린들이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는 복숭아·모란나무 아래서 거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민화계는 국가적으로 현대 민화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며 반색하는 분위기다.

메이저 상업 화랑인 갤러리현대는 지난달 14일부터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민화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한 두 기획전을 열면서 이런 흐름을 본격화했다. 구관에서 연 기획전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는 처음 공개되는 수작들을 상당수 포함한 개인 소장 전통 민화와 궁중장식화 27점을 대거 내놓으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민화의 변모상을 보여주었다. 조선 궁궐의 기존 장식도에서 주로 등장한 봉황이 사라지고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등장해 구슬을 갖고 서로 희롱하는 민화인 ‘쌍룡희주도’와 열차가 그려진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의 민화 ‘화조산수도’ 등이 이런 특징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까치와 어울린 호랑이의 천변만화한 표정과 토끼까지 끼어든 연극적 구도의 화면이 나타나는 호랑이 연작 그림들도 나와 민화가 시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회화란 점을 관객에게 일러준다.
전통 민화의 정체성과 조형적 맥락을 계승했다고 파악되는 현재 화단의 소장 작가 작품들과 취미 위주의 창작 민화계 출신 작가들에게 따로 작품 마당을 깔아준 것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림으로써 길을 만들다는 뜻의 ‘화이도’(畵以道)란 제목 아래 신관과 그 옆 두가헌갤러리에서 선보인 현대 작가 기획전에서는 창작 민화계 출신의 김남경, 정재은 작가와 기존 화단이나 국외 활동을 하면서 화력을 닦아온 김지평, 박방영, 안성민, 이두원 작가의 작품 75점이 내걸렸다. 낙서화를 방불케 하는 분방한 사람과 동식물의 화면(박방영), 양모 화폭에 일러스트처럼 표현한 까치호랑이의 자태(이두원), 책가도의 초현실적인 변주(안성민) 등을 통해 현대 작가들이 민화를 배경으로 다채로운 상상력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과 공동 기획했던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전’ 이래로 미국 뉴욕 찰스왕센터, 캔자스 스펜서 미술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순회전을 후원하면서 외국 뮤지엄 관계자들에게 국내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내보이는 프라이빗 비즈니스도 진행 중인데 최근 소개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고 도형태 갤러리현대 부회장은 전했다.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지난 20여년간 옻칠민화의 창작과 장르 정립에 애써온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정 성파 큰스님의 옻칠 근작들을 선보이는 ‘성파선예’전도 10일 경기도박물관에서 성대하게 개막해 현대 민화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될 것이란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미술계 평단에서는 시기상조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민화계 작가들 대부분이 옛 민화를 본떠 그리는 모사화 위주의 제작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다 미술사적으로도 민화 계열 그림들의 개념 차이와 계보 형성 과정에 대한 총체적 연구가 부족한 맹점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까닭이다. 이런 문제적 양상은 갤러리현대의 현대 민화풍 작가 기획전 ‘화이도’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모사화의 범주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작품과 전통 미술과 무속의 요소를 따온 실험적 현대 회화가 이질적인 면모를 보이며 뒤섞여 있고, 개별 작품들도 필력이나 구성 등의 수준 차이가 상당히 드러나는 등의 한계가 보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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