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없으면 배움도 없어…성경 창세기만 질문 62차례”

강성만 기자 2026. 2. 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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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낸 강영안 한동대 석좌교수
강영안 한동대 석좌교수가 한겨레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최근 대담집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복 있는 사람)을 낸 강영안(74) 한동대 석좌교수는 독실한 기독교인 철학자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칸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레이든대학과 계명대,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정년 3년을 앞두고 2015년 은퇴하였다. 퇴임 2년 뒤부터는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미국 미시간에 세운 칼빈 신학교에서 ‘철학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미국에 머물며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한국에서 줌으로 지도한다. 그가 이 학교에서 배출한 신학 박사만 4명이다. 재작년부터는 한동대 학부생 대상으로 ‘기독교 고전’ 수업도 한다.

“이번 줌 수업에는 13명이 참여해요. 신학 주제인 계시와 삼위일체론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수업인데요. 한국 신학교에는 이런 강의가 없습니다. 이번에 다루는 수업은 저에게도 새롭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강의를 반복하지 않아요. 제가 지루하거든요. 이 수업에는 필독서가 8권, 참고도서가 7권인데, 저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 고전 수업도 매번 다루는 책을 바꾸죠. 그래야 제가 공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4일 천안아산역 인근 자택에서 만난 그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재밌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서죠. 저에게 공부는 이제 일이고 놀이이고 쉼입니다.” 그는 요즘도 매년 200권 이상의 책을 산단다. 최근 구입 목록엔 요즘 푹 빠져 다시 읽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영문 연구서도 있다.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표지.

최종원 캐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교 교수가 질문자로 나선 이번 책은 ‘지식과 지식인’, ‘신학과 교육’, ‘한국 교회’, ‘강영안의 공부’를 놓고 질의·응답이 이뤄진다. 출간 3주 만에 3쇄를 찍었다. 그가 2년 전 펴낸 ‘생각한다는 것’도 지금 5쇄가 판매 중이다.

그는 지금껏 네권의 대담집을 냈다. 2008년 낸 첫 대담집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는 제자인 표정훈 평론가가 질문자다.

왜 대담집일까 묻자 그는 “저는 삶 자체를 인격적 교류로 본다”고 했다. “(대담집 출간에 앞서) 90년대 말부터 대중적인 글은 경어체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처럼요. 학술 공간과는 다른 일종의 상상의 공간을 만든 거죠. 그러니 막힌 글도 쉽게 풀려나가더군요. 그때 깨달았죠. 철학의 언어나 개념도 결국 만남이라는 걸요. 대담은 이 연장선입니다.”

그는 책에서 ‘공부한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했다. “질문하고, 책임지며, 사랑으로 응답하는 한 인간의 생애 전체에 걸친 형성의 여정.”

여기서 방점은 ‘형성’에 있단다. “형성은 절로 되는 게 아니라 변화에서 시작해요. 삶의 태도, 삶의 방식 변화가 있은 다음 형성의 과정을 밟는 것이죠.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중심에서 타자 중심으로 전환입니다. 이 전환과 함께 서서히 빚어져 가는 과정, 곧 형성의 과정이 생애 전체에 걸쳐 서서히 진행됩니다. 결국 삶에 책임지고 응답하는 인간이 되는 거지요. 응답은 단순한 반응을 넘어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 부름이 있을 때 가장 적합하게 반응하고 책임지는 행위이지요. 삶의 자리에서 부름에 반응을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가 배움과 배우지 못함의 차이라고 봐요.”

그가 생각하는 공부의 입구는 질문이다. “뭐든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때 질문이 생깁니다. 질문이 없으면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변화도 없어요. 타자의 고통에도 무관심하죠.”

종교도 질문 없이 가능하지 않단다. “질문은 유대인 교육 방식이기도 해요. 창세기만 해도 질문이 62번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질문이 185번 넘게 나와요.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 첫말이 바로 질문입니다. 세례요한 제자 둘이 따라오니 ‘뭘 찾습니까’라고 물어요. 여기에 제자들은 ‘어디 머무십니까’라고 질문으로 답하죠. 누가복음에는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율법에 뭐라고 쓰여 있고 어떻게 읽으시느냐’고 예수님이 되물어요. 동양 전통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주자학을 시작한 주희는 글을 읽을 때 반드시 의문을 가지라고 했어요.”

그가 9년째 가르치는 칼빈 신학교에는 40개국 이상 학생이 다닌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질문이 없어요. 시험을 봐도 다른 학생들과 달리 정답에 이르는 과정을 생각하기보다 정답을 곧장 말하고 싶어 해요.”

왜냐고 하자 그는 “교육을 통해 형성된 것 같다”면서 그 배경으로 셋을 들었다.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 문화”, “참이 뭔지, 사실이 뭔지 알고 싶어하는 관심의 결여”, “새로운 것을 찾아 드러내려는 노력을 격려하지 않는 태도”였다. “묻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드러낼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자 그는 “먼저 가정에서부터 아이들의 질문을 부추겨야 한다”고 했다. “사실 아이들은 타고난 질문꾼입니다. 아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죠. 그걸 부모들이 가로막아요. 아이의 호기심과 탐구심을 부모가 키워줘야 합니다.”

더해,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과 수평적 관계에서 ‘서로 함께 배운다’는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단다. “배움은 환대입니다. 배울 때 우리는 모르는 것을 배우잖아요? 아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나에게 타자, 나와 다른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환대입니다. 그러니 배움은 본질적으로 환대 행위이지요.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환대하지 않으면 진정한 배움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과 지식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려 해선 안 됩니다.”

그는 이어 손학(損學·unlearning)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손학은 잘못 배웠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걷어낸다는 뜻으로 그가 만든 개념이다. “덜어내지 않고는 배울 수 없어요.” 그는 손학을 위해 ‘타자를 환대하는 사유’, ‘생태학적 사유’, ‘어떤 문제에나 여러 접근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다원적 사유’가 오늘날 요구된다고 했다. “세 사유에는 공통으로 타자와의 관계가 깔렸죠.”

최근 그가 겪은 ‘손학’은 뭘까? “사실 저의 신앙과 공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가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입니다. 고교생 때 그의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한동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가르치면서 빛과 더불어 어둠을 함께 보려고 애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을 처단하려고 로마 공권력을 몇차례 끌어들였거든요. 종교 문제 해결에 정치권력을 썼습니다. 이후 정교 결탁의 어둠의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기독교는 결코 힘의 종교, 체제의 종교가 아닌데 말이지요.”

신앙관이 보수적인 고신 교단 교회의 장로인 그는 지난 1월 말부터 교회에서 ‘질문하는 십계명’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성경의) 십계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한테 주어진 질문으로 생각해보자는 의도이죠. 교회라도 마음 놓고 질문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그가 보기에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반지성주의이다. 그가 60여년 전 처음 만났던 교회는 오늘의 교회와 많이 달랐다. 그때 교회는 그에게 지적 자극의 원천이었다. “교회에서 학생들이 편을 나눠 여자가 좋은지 남자가 좋은지, 여름이 좋은지 겨울이 좋은지 비신앙적 주제를 두고 토론을 자주 했어요. 편을 바꿔 상대 입장에서 토론하기도 했죠. 그러면서 당연히 주어진 것들을 문제 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죠.”

반지성주의와 더불어 “신앙과 삶의 분리”도 우려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자리는 세상”이라며 “교회는 성도들을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 세상으로 내어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삶의 길이고, 삶의 방식이며 신앙의 열매는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사람이 함께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강영안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교회가 지금 할 일 중 가장 큰 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라며 말을 이었다. “교회가 교회 바깥 사람들과 함께 추구할 공동선에는 공정성과 평화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공동의 삶이 가능하지 않고 공공 가치를 추구할 수 없어요. 이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타인을 나보다 나은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덧붙였다. “신뢰 공동체를 세우려면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역지사지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셋을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공통감각’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책에서 한국 신학교육에 신학 외 인문학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성도들이 사는 삶의 자리는 이 세상, 우리가 몸담은 사회잖아요. 이 사회, 이 세상에서 밀알과 같은 존재들이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을 세상에서 신실한 삶을 살게 하자면 그들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의 기쁨과 고통을 알아야 해요. 이렇게 하려면 인문학을 통해 세상과 사람을 공부해야지요.”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 한국 신학교에서는 생각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어요. 목회자 양성 과정도 다 답이 정해져 있어 반복해 답을 외웁니다.”

그는 ‘타자성의 철학’으로 알려진 프랑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95) 철학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린 연구자이다. 그가 2005년에 낸 레비나스 철학 해설서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은 지금껏 20쇄 이상 찍었다. 애초 박사 논문도 레비나스로 쓰려고 했으나 지도교수 권유로 칸트를 택했단다.

레비나스의 어떤 점이 그를 잡아끌었을까?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이 제1 철학이라고 했어요. 윤리학은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타인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가 철학의 가장 큰 문제라고 봤죠. 철학 즉 필로소피아의 원뜻은 ‘지혜 사랑’이잖아요. 레비나스에게 지혜는 바로 사랑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철학은 ‘사랑의 지혜 사랑’이죠. 사랑의 특징은 내어주는 것, 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답이 이어졌다. “레비나스 철학을 다르게 표현하면 ‘타인의 얼굴’이 핵심입니다. 고통받는 자를 대신해 짐을 짊어져 준다는 거죠. 그게 참된 주체의 모습이며 참된 삶을 사는 겁니다.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고 대신 짐을 져주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삶이라는 거죠.”

그는 레비나스의 주체는 ‘향유하는 삶’과 ‘타자에 대한 환대’ 두 개념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누구나 먹고 마시고 거주하며 삶을 누리고 즐기는 향유의 주체입니다. 나를 나답게, 나를 주체답게 하는 또 다른 개념은 환대입니다. 환대는 ‘타자를 환영하고 받아들임’입니다. 타자 역시 먹고 마시고 거주하고 생각하며 삶을 누리는 향유의 주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환대는 타자가 향유의 주체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나의 나됨을 형성하는 데 본질적이라는 것이죠.”

인터뷰를 마치며 삶의 여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 한권을 꼽아달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입니다. 1600년도 더 된 책이지만 시간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요. 고2 때 읽었는데요. 지금도 심금을 울립니다. 저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때문이죠.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입니다. 당신(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으니 당신 안에 쉼을 누릴 때까지 나의 마음은 쉼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앞으로 집필 계획도 물었다. “질문하는 것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어요. ‘질문의 현상학’이라고 할까요. 동아시아 전통이나 기독교, 소크라테스를 들여다보면 다 질문을 강조했지만 질문의 방식이나 의미, 질문이 삶에 가진 자리가 달라요. 소크라테스는 한 개념의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기 위해, 유교 전통은 실천을 끌어내기 위해, 기독교는 내가 지금 누구와 대면하고 있는지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기 위해 묻습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거죠. 우리가 물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묻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냥 그대로 살아도 되는가? 이 물음조차 잊어야 하는가? 제가 이번에 낸 책에서 강조했듯이 삶 전체가 공부라면 질문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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