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온 박정민표 멜로…액션으로 치환된 사랑의 언어
- 청룡영화제 화사와 무대 화제
- 마침 ‘멜로’ 요구 커진 때 개봉
- 스턴트맨도 난색 표할 정도로
- 난도 높은 류승완표 액션 통해
- 절절한 사랑 표현하는 역 소화
“한 번 실수하고 잘못했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사랑하는 전 연인을 죽기 전까지 눈에 담고 싶어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영화 ‘휴민트’를 보기 전엔 멜로가 은은하게 깔린 ‘액션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휴민트’는 액션을 기저에 둔 ‘멜로 영화’다. 여러모로 타이밍이 절묘하다. 가수 화사와 특별 공연을 가진 청룡영화상에서 촉발된 ‘박정민 멜로’를 향한 수요가 들끓고 있는 시점에 이토록 가슴 절절한 박정민 멜로 영화가 나오다니. (청룡 전에 영화를 찍어 둔) 류승완 감독의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역도 가능하다. 대중이 박정민 매력에 심봉사처럼 눈을 뜨기 전에 그의 매력을 알아본 류승완의 선구안 덕분에 관객 역시 적기에 ‘멜로하는 박정민’을 만나게 됐으니 말이다.
사람을 통한 정보 활동이라는 뜻의 ‘휴민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정보원 채선화(신세경)를 둘러싼 대한민국 국정원 소속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의 대립과 공조를 그린다.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 박건은 매사에 철두철미한 ‘대문자 T’형 인간. 그런 그가 유일하게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는데, 과거의 연인 선화 앞에서다. 선화를 향한 순애보는 어느 순간, 이 남자가 세상을 사는 이유가 된다. 이런 순정남, 어디에도 없다.
▮액션은 거들 뿐, 박정민표 ‘멜로’

흥미롭게도 박정민 역시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휴민트’가 절절한 멜로인 줄 낌새도 채지 못했다”고 한다. “한 인간이 감정적으로 무너지면서 생기는 선택들과 거기서 오는 타고 일어나는 일을 그린 영화”로 생각했던 박정민은 “촬영 시작 후 영화가 표현하는 무드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냥 액션 영화는 아님”을 깨달았다. 박정민은 “채선화라는 존재가 박건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신세경이란 배우가 가진 기본적인 매력 덕분에 선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며 신세경에게 감사를 표했다.
‘휴민트’엔 ‘사랑’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을 읽을 수 있는 뉘앙스는 곳곳에 포박돼 있는데, ‘사랑의 언어’가 ‘액션’으로 치환돼 표현되기 때문이다. 옛 연인을 향한 미련과 실패한 사랑에 대한 늦은 후회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애쓰는 박건의 마음이 액션을 통해 내내 진동한다. “주먹을 막을 때의 내 표정, 나의 시선!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를 바라보느냐! 그런 건, 모두 감정이지 않나. 그런 디테일들을 계산하며 연기했다. 예상하겠지만, 박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단 하나. 채선화다.”
박정민은 이번 영화를 찍으며 멋있어 보이려 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건스러워한다는 건 늘 염두에 뒀다. “류승완 감독님이 이전부터 저에게 ‘조명을 못 찾아 먹는다(멋있어 보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사실, ‘밀수’까지만 해도 조명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었다. 그러나 박건의 경우, 정말로 조명을 찾아 먹어야 하는 인물이라서 그걸 유념하면서 연기했다. 가령, 세팅된 조명의 어디까지 들어가야 그림자가 박건 얼굴에 반 정도 걸쳐지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카메라-조명과도 연기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류승완 감독의 작품답게 액션 난도가 상당하다. 특히 국정원 요원 임대리(정유진)와 건물 좁은 계단에서 벌이는 계단 낙하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통증을 안길 정도로 타격감이 상당한데, 라트비아 현지 스턴트맨들도 난색을 표할 정도로 난도가 높았다. “이런 액션을 해 본 적이 없는 친구들인지라 처음엔 몸을 사리더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무서웠을 거다. 그리고 한국팀과는 끝나면 안 볼 사이 아닌가.(웃음) 그게 답답했는지 류승완 감독님이 직접 몸을 던져서 바닥을 구르며 시범을 보이셨다. 그들로선 감독이 직접 몸을 던지는 게 또 신기해 보였던 것 같다. 갑자기 자기들도 몸을 던지기 시작하더니 끝내 도파민이 터진 것 같더라. 다음 액션 현장에도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해피하게 촬영을 끝낸 기억이 난다.”
이미 주연 배우로 여러 작품에 출연해 온 박정민이지만, 이번엔 그 마음이 조금 달랐다. 단편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온 류승완 감독 작품에선 처음으로 맡는 주연인 까닭이다. “연기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태도, 그리고 관계에 대한 태도들을 이번 작품에서 배웠다. 누군가 믿을 사람이 있다는 것과, (주연으로서) 내가 누군가의 믿을 사람이 되어 줘야 한다는 건 차이가 크더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실제로 류승완 감독은 최근 박정민이 운영하는 출판사 ‘무제’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대장 노릇 엄청 싫어하는 박정민이 이번엔 형 노릇을 해줘서 고맙다”고 말한 바 있다. 박정민이 ‘휴민트’에 어떤 마음으로 참여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올해가 진짜 영화 안식년… 출판사 활동은 계속”

대화는 돌고 돌아, 다시 청룡영화제로 돌아왔다. 워낙 이슈가 된 일인만큼 관련 질문이 없을 수 없었는데,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정작 박정민은 덤덤해 보였다. 뭇 여성들이 박정민에게 설레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의도도 전혀 없었다. 세상은 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상한 선물을 주기도 하지 않나. 그냥 ‘그런 거겠지. 그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으로 살지 ‘사람들이 날 왜 그렇게 좋아할까. 이걸 어떻게 이용할까’라는 생각은 안 한다”고 웃어 보였다.
이어 “살면서, 노리던 것들을 얻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노리지 않는 게 버릇이 됐다. 저는 그걸 ‘목적 없는 삶’이라고 표현하는데,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선택하는 순간,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때 오는 허탈함이 너무 커서 과정에서의 행복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게 되더라. 나는 그게 너무 슬프다. 그래서 그런 걸 안 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언급했듯, 뜻하지 않은 걸 선물로 주는 게 또 기기묘묘한 인생이다. 우연히 얻어걸리는 것들, 예상치 못했는데 발견한 것들. 박정민 또한 그런 일이 많았다고 부언했다. “1인분의 몫을 (잘) 하자고 한 것들이 큰 스포트라이트로 돌아왔다. ‘휴민트’의 주인공이 된 것도 물 흐르듯 흘러온 거다. 데뷔 15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는 건, 그 모든 것들이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박정민은 2025년을 연기 안식년으로 선언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실제로 지난 한 해 영화 활동을 쉬었다. 그런데 미리 찍어둔 작품들이 연이어 개봉하면서 ‘열일’을 한 착시를 줬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인데, 관객들에겐 ‘휴민트’ 이후가 그의 안식년처럼 비칠 것으로 보인다. “찍어둔 작품들이 다 공개됐고, 작년에 쉬어서 이제 나올 작품이 없다. 지난해에 쉰 업보가 올해 돌아올 예정”이라고.
스크린에서 박정민을 다시 만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출판사 ‘무제’ 활동을 하는 박정민은 계속 만나볼 수 있다. “박정민이라는 인간이 출판계에 가서 뭔가를 하고 있는데, 개인 이득만 취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좋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 드리고,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해 보려고 한다.” 배우만큼이나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작가라는 직업군과 일하는 심정은 어떨까. 박정민은 혼자 정한 사훈이라며, ‘무제’의 사훈을 공개했다. “우리가 살길은 무조건 작가다. 우린 작가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라니. 이 사랑이 그를 목적 없는 삶으로 데려다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시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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