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을 이끈 학생은 늘 현장에 있었다

한겨레21 2026. 2. 10. 18:2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출옥 이후에도 학생운동 이끈 이천진, 기자로서도 현장 취재 전념
1927년 9월2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6·10 만세운동 참가자 8명. 이천진(경성제대), 이선호(중앙), 박두종(청년회학관), 황정환(중동), 이동환(중앙), 박용규(중앙), 곽대형(중동), 김재문(중동)이다. 유감스럽게도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식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임경석 제공

이천진이 석방된 날은 1927년 9월20일이었다. 체포되고 1년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날 새벽 5시30분 해 뜨기 전 어두컴컴한 시야를 뚫고, 젊은 죄수 8명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육중한 옥문 사이로 걸어 나왔다. 6·10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학생들이었다.1

다행히 쓸쓸하지는 않았다. 출영객 50여 명이 그들을 맞았다.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한밤중인 새벽 3시부터 출소자들을 맞이하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소 수척해 보였으나, 다들 원기왕성했다. 출영객들과 뜨거운 악수를 나눴고, 출감 기념사진도 찍었다. 귀한 자동차까지 두 대나 준비돼 있었다. 출소자들은 수표동 조선교육협회 기숙사로 안내받았다. 지방 출신 유학생과 고학생이 공동으로 숙식하던 기숙사이자, 6·10 만세운동의 주요 모의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많을 때는 학생 90명이 취사를 같이하며 동고동락하던 곳이다. 이천진도 그 기숙사에서 4년간이나 기거했다. 고등보통학교도 그곳에서 통학했고, 경성제대 입시도 그곳에서 준비했다. 뜨거운 환영, 헌신에 대한 찬양, 옥중 고초에 대한 위로가 오갔다.

그러나 머지않아 출감자들은 냉엄한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다. 갈 곳이 없었다. 이천진도 그랬다. 그는 더 이상 경성제대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일찌감치 모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당했다. 복학이나 재입학 등 되돌아갈 가망은 전혀 없었다. 그뿐인가. 시국사범의 전과자가 됐다. 요시찰인 명부에 등재돼 줄곧 경찰의 감시망 속에서 살아야 하며, 행여 공공 영역으로의 진출은 꿈도 꾸면 안 되는 처지가 됐다.

재기를 위한 이천진의 비책

고향이 그에게 위안을 줬던 것 같다. ‘함경남도 북청군 양가면 중리 1633번지’가 그의 본적지였다. 이천진은 고향에 내려가 심신의 회복을 꾀했다.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식민지 통치 권력의 사법적 징벌을 받았고, 그동안 쌓아올렸던 사회적 성취를 모두 상실했음에도 위축되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수감되기 이전과 동일한 행동 양상을 보였다.

이천진은 6·10 만세운동 이전에 이미 북청 지역 사상단체 ‘일칠회’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지낸 바 있었다. 김교영, 김유인, 한해 등 유명하고 쟁쟁한 사회주의자들이 그의 동료였다.2 그뿐만이 아니다. 북청청년회연합회에도 참여해 대회 의장을 맡는 등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함남 북청군의 사상운동과 청년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형무소에서 출옥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도리어 활동 범위를 더 확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1927년 11월 신북청노동조합 설립 1주년 기념식장에서 축사를 낭독했고, 다음 달에는 양가면의 면민대회에 참석해 일상적 경제문제 해결에도 관여했다. 수리조합 몽리구역의 확대, 신설 시장의 위치 선정, 산미조합의 사업 내용 조사 등이 현안이었는데, 이천진은 그중에서 산미조합 조사위원 다섯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1928년 1월에는 군내 14개면의 농민운동을 통합하기 위해 북청농민조합연합 창립대회가 열렸는데, 그 단체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종전에 사상운동·청년운동에 머물러 있던 이천진의 활동 반경이 노동운동·농민운동 영역으로 확장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에서의 생활이, 더 나아가 고향에서 뿌리내린 진보적인 민중운동의 네트워크가 그에게 정체성의 회복과 재정립을 돕는 구실을 했던 것 같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천진에게는 재기를 위한 또 하나의 비책이 있었다. 그에게는 공부 잘하는 능력, 그래서 상급학교 입학시험 장벽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었다. 그는 사립 전문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경성제국대학이나 총독부가 관리하는 관립 전문학교 입학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미국인 선교사나 조선인들이 경영하는 사립 전문학교라면 달랐다. 시험 성적만 좋다면 입학이 가능했다.

1928년 3월 입시에서 이천진이 택한 학교는 보성전문학교였다. 신입생 정원은 법과 40명, 상과 40명이었다. 시험과목은 영어, 국어(일본어), 수학, 지리역사 네 과목이었다. 이천진은 상과에 응시했다.

입학 직후 다시 시작한 학생운동

당시 학제상으로 신학기 개학일은 매년 4월 초였다. 이천진은 1928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상과 1학년 신분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신학기가 열리자마자 이천진은 놀라운 행동 양상을 보였다. 학생운동에 재투신한 것이다. 2년 전 자신이 이끈 6·10 만세운동의 여파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학생과학연구회 재건에 나섰다. 1928년 4월15일, 개강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학생과학연구회 총회가 열렸다. “이때껏 침체 상태에 있다가 금년 신학기를 기하여 운동선의 통일과 그 자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개최된 총회였다. 이천진은 이 집회에서 중앙검사위원 다섯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3

이때 이현상·강병도 등과 같은, 뒷날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이천진은 외연을 넓혔다. 학생과학연구회 외에 조선학생회라는 단체에도 진출했다. 조선학생회는 위상이 달랐다. 전문학교 학생만을 조직 대상으로 삼았다. 또 입회 희망자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회원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단체였다. 비유하자면 ‘서울 지역 대학·전문학교 학생회 연합’ 같은 위상이었다. 집행부 구성 원칙에 그런 성격이 잘 드러난다. 1929년 2월3일 조선학생회 제3차 총회에서 집행위원 18명을 선출했는데, 그들은 서울에 소재한 9개 대학 및 전문학교의 대표자였다. 이천진은 보성전문학교를 대표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의 자격으로 뽑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29년 2~5월, 1930년 4~6월 두 차례 걸쳐서 그 단체를 대표하는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조선학생회는 학생과학연구회와 달리 온건한 학생단체로 간주됐다. 전문학교 학생들을 망라해 대표하는 단체로 자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비밀 정보보고에 따르면 점차 과격화하고 있다고 한다. “집행위원 중에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이천진 등이 있으며, 점차 좌경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적었다.4 이천진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천진이 집행위원 및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눈길이 간다. 광주학생운동에서 비롯된 전국 범위의 항일 학생시위가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1929년 11월 두 차례 걸쳐 전남 광주에서 항일 거리시위가 벌어졌고, 뒤이어 서울에서도 중등학교 학생들이 항일 구호를 내세워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2월9일 제1차 연합 거리시위, 다음 달인 1930년 1월15~16일 제2차 연합 거리시위가 전개됐다. 전 조선에서 거의 모든 중·고등 교육기관의 학생들이 교내 시위, 동맹파업, 격문 살포 등에 나섰다. 도시 주민층과 농촌 대중이 호응한다면 또다시 3·1운동 같은 거대한 봉기가 터져나올 판이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이천진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 없지만, 그가 가만히 손놓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정보가 있다. 이천진은 1930년 6월 항일 격문 사건을 수사하던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서울 시내에 은밀히 배포된 항일 격문의 제작과 배포에 연루된 혐의였다. 머지않아 풀려났지만, 그를 향한 경찰의 감시 눈초리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천진의 기명 연재 기사, ‘파시즘의 범람과 정당정치의 조종 (1)’ 지면,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16일 1면. 임경석 제공

조선의 현장에 밀착했던 기자

1931년 3월 이천진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나이 28살이었다. 그해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은 이는 법과 23명, 상과 30명, 합계 53명이었다. 이 중에서 이천진은 학업 성취도 상위 5명에게 부여하는 우등생으로 선정됐다.

이천진은 언론계로 진출했다. 조선중앙일보 신문기자로 취업했다. 이 신문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더불어 조선인 언론계를 삼분하는 영향력 있는 매체였다. 세 신문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평에 따르면 조선중앙일보 기자에 사회주의자가 다수 포함됐다는데, 이천진도 그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곤 했다.

신문 지면에 이천진의 기명 기사가 적잖이 남아 있다. 여러 주제에 걸쳐 있다. 서울 시내 총독부 경무국 취재, 남부 지방 농촌의 실상 취재, 서해안 사곶나루 나룻배 분쟁 취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백남운의 저서에 대한 평, 일본 중앙 정계의 동향과 이면 분석 등에 걸쳐 다양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현장 취재에 전념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취재를 목적으로 출장한 곳을 꼽아보면 충북 옥천, 황해도 옹진, 일본 도쿄 등이다. 이 중에서 황해도 옹진 건은 해결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출장이었다. 신문사 현지 지국장이 취재 도중 옹진경찰서에 체포되기까지 했던 사안이다. 자사 지국 기자들이 현지 경찰에게 압박받는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가 본사에서 파견된 이천진 기자에게 부과됐다.

이천진의 기명 기사에는 뚜렷한 특징이 눈에 띈다. 취재의 초점이 조선의 객관적 현실에 관한 것, 일본 국가권력의 향배와 작동 시스템에 관한 것으로 맞춰져 있었다. 조선 혁명의 주·객관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 탐구, 이것이 그의 기자 정신에 내재하는 숨은 혼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천진의 언론 활동은 1936년 갑자기 중단됐다. 신문사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해 그해 9월 휴간되고 이듬해 결국 폐간됐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이어 30대 중반에도 다시 한번 그의 커리어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고향의 네트워크가 이천진을 감싸안았다. 그는 함남 북청·이원군 일대를 배경으로 기업 활동에 발을 내디뎠다. 이흥양조회사에 간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중앙 언론계에서 활약하던 이천진씨’가 전무가 됐다고 한다. 이원군의 융성이라는 뜻을 가진 회사였다. ‘이흥소주’라는 품질 좋은 술을 생산하고, 장차 곡물 무역업에도 진출할 예정이라고 했다.5

1946년의 마지막 기록, 그리고 이후의 삶

해방 직후에도 그의 이름은 간간이 신문지상에 나타난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집행부 서기로 선임됐고,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사회정책분야 전문분과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여기까지다. 이후 이천진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정보를 우리는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종래 그래왔듯이 진보적 민주주의 운동과 사상의 흐름 속에서 전문성을 가진 지식인의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사랑하던 고향 함남 북청군 일대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 문헌

1. ‘친우들의 출영으로 8명은 출옥’, 동아일보 1927년 9월21일, 2면.

2. ‘一七會 갱신’, 조선일보 1926년 2월4일, 조간 1면.

3. ‘조선학생과학연구대회’, 조선일보 1928년 4월17일, 2면.

4. ‘단체명부’ ‘治安槪況 京畿道’, 경성지방법원검사국 문서, 1928년, 국편 한국사DB.

5. ‘酒造곡물무역의 利興釀造회사’, 조선일보 1936년 11월23일, 6면.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https://h21.hani.co.kr/arti/COLUMN/2273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