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올린 기획예산처, 재정 혁신으로 ‘하향식 예산’ 안착을
“일하는 방식의 혁명, ‘통제’에서 ‘권한 위임’으로”


새 정부가 출범하면 그 정부의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 조직 개편이 뒤따른다. 이재명 정부의 정부 조직 개편 중 경제부처에서 주목되는 것은 에너지 대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기후에너지환경부를 확대한 것과 함께, 기획재정부의 기획·예산 기능을 분리하여 기획예산처를 독립시킨 점이다.
왜 기획예산처를 새로 두었을까? 우리는 전통적으로 상향식(Bottom-Up) 예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각 부처 및 하위 기관이 개별 사업별 소요 예산을 산정하여 예산 요구서를 기재부 예산실에 제출하면, 기재부가 이를 종합·조정하여 총지출 규모에 맞게 국회 심의를 거쳐 확정하는 방식이다. 각 사업 예산이 중앙 심의를 통해 확정되므로 부처의 재량 여지가 제한되고, 예산 집행 중 신규 현안이 발생해도 자체 조정이 어렵다. 또한 증액이나 전용을 위해서는 추가 협의나 추경 편성 등의 경직된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빠른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예산 성과 부진 시 부처는 “승인된 예산대로 집행했다”라고 하고, 중앙 재정 당국은 “부처 요청에 따라 편성했다”라고 항변할 수 있어 성과 평가도 쉽지 않다. 특히 각 부처의 요구를 단순 합산하여 조정하므로 총액 통제가 어렵고, 해마다 예산이 점증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이 생겨 “과잉 요구와 대폭 삭감”이라는 비효율적 협상 관행이 나타난다. 세부 항목 중심의 편성으로 인해 “전략적 우선순위 반영”이 어렵다는 재정 운용의 효율성 문제도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AI 시대에 요구되는 예산 편성의 방식은?
하향식 예산제는 중앙 재정 당국이 예산 총규모를 먼저 정하고 부처별 지출 한도를 설정하면, 각 부처가 그 한도 내에서 자체적으로 세부 예산을 편성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참여정부 시절 재정 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되어, 2005년도 예산 편성부터 5개 헌법기관을 제외한 모든 중앙정부 부처에 적용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예산 편성에 ‘국가재정운용계획’이라는 중기 재정 전략을 반영하고,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분야별·부처별 지출 한도를 결정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이후 각 부처는 배정된 총액 한도 내에서 사업별 예산안을 편성하고, 기획재정부의 검토와 조정을 거쳐 정부 예산안을 확정한다. 참여정부는 ‘국가재정법’(2006년 제정) 제29조 제2항에 기획재정부 장관이 예산 편성 지침을 통보할 때 “중앙관서별 지출 한도”를 포함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총액 배분과 자율 편성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2005년 도입된 ‘하향식 예산제도’는 왜 작동하지 않았나?
다른 한편으로, 국가재정법 제29조 제2항은 장관이 “지출 한도를 포함하여 통보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 임의 규정으로, 강제력이 없어 실행력이 담보되지 않았다. 더욱이 제재와 인센티브 장치도 부재했다. 부처가 지출 한도를 어겨 과도한 예산을 요구해도 제재할 수단이 없었고, 효율적으로 예산을 절감해도 부처에 돌아가는 보상이 없었다. 그 결과 “지킬 유인은 없고 어겨도 패널티는 없는” 구조에서 하향식 원칙은 작동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제도는 도입되었으되 일하는 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특히 하향식 제도는 성과주의 예산과 연계될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이를 뒷받침할 성과 관리 체계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점도 뼈아프다. 성과 관리의 미흡은 “자율 편성→책임성 강화”라는 선순환을 가로막고, 다시 중앙의 통제를 부르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이에 더해 감사원의 감사, 특히 정책 감사는 공무원의 선제적인 정책 결정을 위축시키는 핵심 요인이 되어 왔다. 과거 감사원이 정책 결정 자체에 대해 사후 문책성 감사를 실시함에 따라, 공직사회는 감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험적이지만 꼭 필요한 예산 배분 결정을 꺼리게 되었다. 이러한 지나친 사후 감사는 공무원들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보다 안전한 선택만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부처는 예산을 구조조정하거나 성과 극대화 전략을 시도하기보다 감사 지적을 피할 소극적인 편성에 머물게 된다. 하향식 제도의 정착을 위해서는 감사 제도에서 “적극행정 면책”을 대폭 확대하여, 절차를 준수하며 창의적으로 업무를 추진한 경우 결과가 미흡해도 책임을 면해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불확실성이 높은 신기술 분야는 “혁신지원형 감사” 대상으로 선정하여, 책임 추궁 대신 문제 해결과 대안 제시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함으로써 공무원들이 사후 감사 걱정 없이 적극적으로 예산을 재배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재정 원칙 재정립·성과 관리 강화로 ‘재정 개혁’ 이어가야
하향식 예산제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 없이 기존 관행을 유지한 탓에 정착되지 못했다. 거의 모든 분야에 AI가 도입되어 급변하는 환경에 즉각 대응해야 하는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하향식 예산제도다. 이 제도는 중앙집권이 아닌 분권화를 통해 현장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성과를 평가해 확산시키는 권한 위임(Empowerment)을 전제로 한다. 단순히 형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를 혁신하는 재정 개혁의 출발점인 것이다. 올해 출범한 기획예산처가 이 제도를 안착시켜 국가의 중장기 목표를 기획하고, 각 부처가 자율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예산제도의 패러다임을 바꿔주길 기대해 본다.
이용우 전 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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