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이별의 초대장 [이수진의 이혼 이야기]
이혼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혼은 오랜 시간 쌓여온 침묵과 단절, 그리고 말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입니다.
남도일보는 이번 기획 연재 [이수진의 이혼 이야기]를 통해 이혼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나 사건의 승패가 아니라, 관계가 멀어져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같은 집에 살았지만 각자의 섬에서 살아온 시간, 서로를 곁에 두고도 혼자가 되었던 순간들, 그리고 그 끝에 이혼이라는 선택이 놓이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법률가의 시선과 상담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냅니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으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내용증명을 받았습니다.가정을 생각해 참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겠다며 이혼 의사 여부를 이달 안에 결정해 알려 달라는 차가운 통보였습니다. 평범한 오후였고, 특별한 다툼도 없던 날이었습니다.
등기 봉투를 든 채 복도에 서서, 한참을 그렇게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손에 든 종이의 무게가 평생의 삶을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간 집 대출금을 꼬박꼬박 갚았고, 매달 관리비와 자녀들의 비싼 학원비도 모두 성실히 부담하며 가장으로서 소홀하지 않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혼을 원치 않습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가족을 버린 적도, 경제적 책임을 회피한 적도, 외도나 폭언 같은 소위 '큰 사고'를 친 적도 없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가장의 역할을 해왔고, 그것이 곧 사랑의 증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본 내용증명 속에는 무미건조하면서도 가슴을 콕 찌르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사람과 한 공간에 지내는 것이 괴롭다." 이혼 상담을 하며 가장 흔하게, 그리고 가장 아프게 듣는 사연입니다.
많은 분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라며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특히 자신의 노력을 '숫자'로 치환해 설명하곤 합니다. 한 달에 얼마를 벌어다 주었는지, 어떤 아파트를 장만했는지, 자녀들을 어떤 학교에 보냈는지를 말하며 자신의 책임감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혼은 결코 숫자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법적·경제적 책임을 다했다는 '성실함'과, 매일의 삶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간다는 '정서적 연결감'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이혼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시작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쌓인 작은 단절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빙벽에 가깝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줄고, 오늘 내가 느꼈던 슬픔이나 기쁨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서로의 하루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지고, 식탁 위에서는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립니다.
겉으로 보기에 갈등은 없지만, 그 자리를 침묵이 대신하고, 참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며 견디는 시간만 늘어납니다. 그러다 어느 한쪽이 더 이상 이 차가운 고립을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분이 말다툼도 없었고, 집안이 발칵 뒤집힐 만한 사건도 없었는데 왜 이토록 극단적인 통보를 받아야 하느냐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쪽은 "나는 내 역할을 다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나는 이 집에서 오래전부터 철저히 혼자였다"고 흐느낍니다. 이 깊은 간극이 바로 오늘날 많은 부부가 마주하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혼은 승패를 가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누가 더 많은 돈을 벌어왔고, 누가 더 희생했는지를 따지는 장부 정리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를 곁에 두고도 각자의 섬에서 살기 시작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고립의 신호를 얼마나 오래, 당연하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이혼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말없이 쌓여온 소홀함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이제는 누가 더 많이 내고 기여했는지가 아니라, 서로가 언제부터 혼자가 되었는지를 겸허히 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가까이 있기에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이혼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가 다시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법률가의 객관적인 시선과 상담가의 공감을 담아, 부부들이 마주한 솔직하고도 아픈 풍경을 매주 전해드리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멈춰 서서 옆 사람의 손을 다시 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진 변호사 ·법무법인 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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