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의 압승과 ‘죄수의 딜레마’ [아침햇발]

길윤형 기자 2026. 2. 1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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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이자 총리인 다카이치 사나에가 8일(현지시각)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중의원 선거 당일 언론과 대화하던 중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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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ㅣ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휘두르는 횡포에 맞서기 위해 “‘미들 파워’(중견국)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지난달 20일 다보스 포럼 연설을 울면서 읽었다. 내 심장을 울린 이 ‘대담하고, 위대한’ 연설을 거듭 읽고 내린 결론은 그의 구상을 ‘단기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카니 총리는 말했다. “중견국들은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가 패권국(hegemon)과 단독으로 협상한다면 우리는 약자의 위치에서 협상하게 됩니다. 그들이 제공하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고, 누가 더 잘 순응하는가를 두고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지난해 봄 ‘트럼프의 미국’과 관세 협상이 시작된 뒤 한·미·일 3개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보다 더 정확히 설명하는 말을 따로 듣지 못했다. 애초 이 협상이 시작됐을 때 한국에선 “한·일이 의사소통을 해가며 미국과 관세 교섭을 할 필요가 있다”(박철희 주일대사,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해 4월23일치 인터뷰), “미국을 상대로 한·일·대만 등이 협의체를 만들어 (협상을) 진행하는 게 타당하다. 한·일이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지난해 6월12일치 닛케이 인터뷰. 인터뷰는 임명 전 이뤄짐)는 의견이 많았다. ‘거대한’ 미국을 상대로 양국이 똘똘 뭉쳐야, 조금이라도 유리한 협상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크고, 버틸 체력도 많았던 일본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초 한-일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는데, 유일하게 찾아낸 예외는 “한·일 양국이 대미 관세 협상에 공동 대응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을 더 자극할 수 있다”(니시노 준야 게이오대 교수, 조선일보 지난해 7월16일치 인터뷰)는 정도였다. 이 매정한 ‘현실론’처럼 한·일의 협상은 따로따로 이뤄졌고, 결국 먼저 합의에 도달한 일본을 향해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좀 야속한 면도 있었다”(지난해 10월29일 브리핑)는 한마디를 내뱉게 된다.

약자들의 연대는 왜 힘든가, 아니 불가능한가. 이를 설명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매우 고전적인 이론이 있다. 옥에 갇힌 죄수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첫째 ‘죄를 자백하는 것’, 둘째 ‘침묵을 지키는 것’. 죄수들에게 최선의 경우는 동시에 침묵을 지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는 것이지만, 결국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침묵을 지켰는데 상대가 배신한다면, 혼자서 혹독한 ‘가중 처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으니 결국 ‘트럼프의 미국’이 늘 손쉬운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달 27일 ‘관세 인상 위협’으로 시작된 현재 위기가 왜 벌어졌는지도 이 이론 틀로 설명할 수 있다. 미국은 왜 한국의 대응이 늦다고 판단했을까. 비교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해 10월29일 미국에 투자 가능한 총 21개 사업(총 4천억달러)을 ‘팩트시트’ 형식으로 정리해 공개했고, 미-일 양해각서(MOU)에 따라 설치하기로 한 ‘협의위원회’를 벌써 네 차례나 개최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다음달 19일로 예상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미국 방문에 맞춰 1호 투자 사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심지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7일 1면 머리기사로 1호 사업에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전력 공급을 위한 가스 화력발전소(약 400억달러) 건설 △대형 유조선(탱커)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약 20억달러) 건설 △인공다이아몬드 생산공장(약 5억달러) 건설 등의 사업이 포함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순순히 말 잘 듣는 일본이 마음에 들었는지 트럼프 대통령은 5일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다카이치 총리의 승리를 기원하는 노골적인 ‘내정 간섭’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대로 일본 전후 정치사에 기록될 놀라운 압승을 거둔 ‘다카이치의 일본’은 더 적극적으로 대미 올인 외교의 길을 갈 것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제1열도선(대만과 오키나와)의 “거부 방어와 관련된 집단 안보를 위해”, 그러니까 중국 견제를 위해 머잖아 평화헌법의 제약을 벗어던질 수도 있다. 누가 더 미국의 횡포에 잘 순응하는지를 두고 한·일이 맞붙는 잔인한 경쟁 구도가 펼쳐졌다. 저들이 짜놓은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살길일까. 숨이 막혀 쓰러질 것만 같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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