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치료 응급 항발작제 ‘공급 공백' 우려...전문가들, 정부에 개선 요청
뇌전증학회 “생명 직결 초기 치료 위해 응급 항발작제 필수"
단일회사 의존·퇴장방지의약품 제도 한계 지적…정부 역할 강화 촉구

충남대학교병원 신경과 김재림 교수는 9일 삼성서울병원에서 열린 대한뇌전증학회 기자간담회에서 "발작을 즉각 멈추는 응급 항발작제는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약품임에도 불구하고, 공급 중단과 단일 회사 의존 구조로 인해 구조적 취약성이 커지고 있다"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재림 교수는 "항발작제는 크게 평소 발작을 예방하는 유지 치료제와, 발작이 발생했을 때 즉시 투약해 발작을 멈추는 응급치료제로 나뉜다"며 "전자는 안전벨트라면, 후자는 사고 시 작동하는 에어백이나 화재 시 소화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두 약물은 제형과 용도가 달라 서로 대체가 불가능하다"며 "유지 치료제는 경구제로 복용하지만, 응급 항발작제는 주사제 형태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공급 공백이 발생하면 임상 현장에서 즉각적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항발작제는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개발돼 왔고, 국내에는 약 20여 종의 약물이 사용되고 있다"며 "최근에는 약물 상호작용과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2·3세대 약물이 주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브리바라세탐(브리비액트), 세노바메이트(엑스코프리) 등 새로운 3세대 항발작제가 도입되면서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 선택지가 생겼다. 김 교수는 "세노바메이트는 국내 기업(SK바이오팜)이 개발했지만 해외에서 먼저 사용돼 왔고, 최근 국내 허가를 받아 올해 출시를 앞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응급 상황에서 사용하는 주사제 항발작제의 공급 공백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디아제팜, 페니토인 주사제는 이미 생산이 중단됐고, 로라제팜과 포스페니토인 주사제도 올해 중단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들 약물은 국제 가이드라인상 뇌전증 지속 상태의 1·2차 치료제로 사용되는 핵심 약물이다.
김 교수는 "약이 없으면 아무리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무용지물이 된다"며 "초기 투약이 지연될 경우 뇌 손상, 후유증, 사망 위험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뇌전증 응급상황은 크게 급성 반복 발작과 뇌전증 지속 상태로 나뉜다. 특히 뇌전증 지속 상태는 발작이 멈추지 않는 상태로, 뇌 손상이 직접 발생하고 사망 위험도 있는 치명적인 상황에 해당한다. 급성 반복 발작은 중간에 의식이 회복되기도 해 보호자나 주변인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치료가 지연되면 뇌전증 지속 상태로 악화될 수 있어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
김 교수는 정부에 응급용 항발작제 주사제 공급안정을 촉구했다. 그는 "정부가 퇴장방지의약품 제도를 통해 필수의약품 보호에 나서고 있지만, 원가 산정 시 인건비·물류비 등 현실적 공급 비용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수익성이 낮은 구조가 지속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을 지속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단일 회사에 의존하는 공급 구조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며 "수요 급증이나 생산 차질이 발생할 경우 의료 현장이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영국과 캐나다는 필수의약품 수급 상황을 상시 모니터링하다가 부족이 예상되면 조기 경고를 발령하고, 대체 약물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거나 긴급 수입 절차를 가동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미국은 연방 정부 차원에서 필수 응급의약품 비축 제도를 운영하며, 공급 공백이 발생하면 정부 재고를 직접 배포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대원 뇌전증학회 이사장도 "뇌전증 지속상태의 1차 치료는 간호사가 바로 벤조디아제핀 주사를 투여하는 것부터 시작되는데, 정작 현장에서 가장 많이 쓰는 아티반(로라제팜)이 생산 중단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며 "대체약이 있더라도, 환자 반응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치료 옵션이 줄어드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환자들은 희귀의약품센터를 통한 우회적·편법적 수입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국가 필수의약품 체계로서 정상적인 구조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편, 비강 분무제와 구강 점막 투여제 제형의 응급 항발작제 도입 필요성도 강조했다. 김 교수는 "해외에서는 비강 분무제나 구강 점막 투여제 형태의 응급 항발작제가 활용되고 있다"며 "의식이 저하되거나 삼킴이 어려운 환자, 지적장애 등으로 협조가 어려운 환자에서도 빠른 투약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에는 이러한 제형이 도입돼 있지 않아 응급 대응 수단이 제한적"이라며 "비강 분무제·구강 점막 투여 제형의 항발작제가 도입된다면 응급 대응 속도와 접근성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림 교수는 "응급 항발작제는 단순한 의약품이 아니라 공공재 성격의 필수 안전망"이라며 "안정적인 공급 체계 구축, 제도적 보호 강화, 새로운 응급 제형의 신속한 도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