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나의 로동신문 탐독기
글쓰기를 배우려는 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잘 쓰고 싶으면, 제발 좀 읽으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어느 시인의 문장에서 ‘곰살맞다’라는 말을 배웠고, 어느 칼럼에선 ‘거멀못’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배웠다. 나름대로 한국어로 된 텍스트를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 우연히 접한 북한 성명문이 내 언어관을 뒤흔들었다. 내용은 늘 그렇듯 남조선 어쩌구 하는 비난이었는데, 기가 막힌 표현이 눈에 밟혔다.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기를 바라는 일.” 사자성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토록 직관적이고 맛깔나는 순우리말로 풀어낼 줄이야.
주변 글쟁이들에게 이런 내용을 공유했더니, 지인이 그럴듯한 가설을 내놨다. ‘남한 최고의 문장가는 일간지 주필이 되지 않나. 그러니 북한 최고의 문장가는 필히 로동신문 기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더구나 남한에선 오보를 내면 시말서로 끝나지만, 북한에선 물리적인 의미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다. 표준어와 문화어로 나뉘긴 했지만, 뿌리를 따지자면 같은 조선말이다. 북조선 최고의 글쟁이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빚어낸 조선말 문장이라니. 그네들의 글솜씨가 너무 궁금했지만, 북한 자료 열람에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탓에 군침만 삼켰다.
그러다 얼마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로동신문이 ‘특수 자료’에서 ‘일반 자료’로 풀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다 싶어서 국회도서관으로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로동신문을 펼치곤 참담한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문장 이전에 내용이 조악하기 짝이 없어서다. 자기네 수령이 ‘젖가루(분유)’ 생산 시설을 시찰했다는 기사 밑엔 누가 봐도 연출된 ‘인민의 행복한 미소’가 박혀 있었고, 국제면엔 서구와 북미의 범죄 소식만 긁어모아 “자본주의의 야만성”이라 비난하는 저열한 선전 선동뿐이었다. 요즘은 국방일보도 그렇게 쓰면 욕먹겠더라.
물론 조악한 선전물에도 남한 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묘하게 중독성 있는 어휘들이 있었다. 분명 우리말 사전에도 ‘휘황한’이나 ‘불피코’, ‘예사로운’ 같은 단어가 들어 있긴 하지만,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 말씨에선 보기 어려운 표현들이었다. 그렇지만 세세년년 존엄높을 수령 일가를 찬미하는 글에 곁들여져 그런지 말맛이 제대로 살질 못했다. 맛깔나는 문화어로 쓰인 북한판 ‘YS는 못말려’ 같은 책을 보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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