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라지나물

임정숙 수필가 2026. 2. 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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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먹덧인가 보다. 처음 새 생명을 품은 둘째 딸이 갑자기 도라지나물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따금 엄마가 해주던, 그 손맛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기쁘고 낯선 시기를 건너는 딸이 엄마의 음식을 찾고 있었다.

마트 진열대에는 팩에 담긴 중국산 깐 도라지만 눈에 띄었다. 이왕이면 향 좋고 단단한 국산 도라지를 사고 싶어 몇 군데를 돌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전통시장으로 나서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선택들 앞에서, 사소한 것 하나에도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도라지나물은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간다. 껍질을 벗기고 손질한 뒤 소금물에 담가 쓴맛과 아린 맛을 뺀다. 몇 번을 헹군 뒤 물기를 꼭 짠다. 팬에 도라지와 파, 마늘을 넣고 맛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참기름을 둘러 볶다가 팬이 마르지 않게 육수를 조금씩 더해가며 불을 살핀다. 손에 익은 순서라 몸이 먼저 움직였다. 특별한 비법은 없었지만, 그동안은 실패하지 않았던 반찬이었다.

그날은 욕심이 문제였다. 딸의 입맛을 조금이라도 더 돋게 해주고 싶었다. 요리 영상을 찾아보았다. 도라지를 물에 살짝 데쳐 볶으라는 팁이 눈에 들어왔다. 더 깊은 맛이 날 것 같았다. 매번 해오던 방식에 그 한 가지만 더 보탠 것이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삭하고 고소해야 할 도라지는 대부분 힘없이 풀어졌다.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면 결을 잃은 채 흐느적거렸다. 데친 데다가 육수를 필요 이상 부어 졸였던 모양이다. 한참을 멍하니 들여다보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딸이 퇴근 후 들를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도라지를 사러 나선 김에 채소도 함께 장을 보았었다. 도라지나물만 달랑 해주기에는 아쉬웠다. 딸이 직장에 다니며 챙기기 번거로울 법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봄동으로 겉절이를 하고, 시금치를 무치고, 호박나물과 생채를 곁들였다. 이 음식들 앞에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고, 맛도 제 몫을 해주었다. 주인공인 도라지나물만 제대로 완성되었다면, 더없이 완벽했을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딸이 들어서는 순간,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허둥댔다. 못 본 사이 딸의 배는 조금 더 불러 있었다. 음식 냄새를 킁킁 맡으며 활짝 웃는 딸 앞에서, 나는 뚝딱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딸은 팬에 담긴 도라지나물의 모양새를 보고 과장되게 혀를 끌끌 차더니 "에고, 주문 취소할까요?" 하며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긴장이 좀 풀리는 듯했다.

엄마의 마음은 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더 잘해주고 싶어 한 번쯤은 넘치고, 그 넘침 때문에 오히려 결을 놓친다. 서두르다 엇나가고, 괜히 욕심을 부리다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그 마음이 한발 앞서 나간 자리에는 자식의 오해가 잠시 머물기도 한다. 다정함은 간섭처럼 보이고, 걱정은 부담으로 읽힌다. 말로 다 닿지 못한 마음들은 그렇게 스쳐간다.

잠시 후 딸에게서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채소 나물로 비빈 비빔밥 위에 도라지로 만든 작은 하트가 얹혀 있었다. 그나마 건져 보낸 도라지였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한 장의 사진에 그날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엄마의 마음까지는 실패하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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