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최소원 2026. 2. 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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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
뉴미디어 등장에 ‘팟캐스트’ 부상
쇠퇴하던 음성매체 찾는 이 늘어
‘한물 간’ 가수와 매니저 이야기
라디오 매개로 지방소멸 조명
故 안성기 열연 박민수 캐릭터
희망·용기 전하는 모습에 ‘뭉클’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가족 여행을 갈 때면 엄마는 늘 CD를 구웠다. 아빠의 좁은 승용차 안에는 엄마가 직접 고른 애창곡들이 쉼 없이 흘러나왔고, 그렇게 엄마가 사랑하던 노래들을 질리도록 듣고 나면 엄마의 손끝은 라디오로 옮겨졌다. 엄마가 즐겨 듣던 FM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청취자의 소소한 일상을 소개하거나, 노래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거나, 때로는 일상 영어를 알려주는 교육적인 코너를 담고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를 채우던 목소리들은 목적지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의 배경음이 되곤 했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버글스의 히트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영상 매체의 발달로 라디오 드라마 시장의 스타들이 설자리를 잃게 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TV와 비디오, 영화 같은 시각 매체들이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음성 매체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던 당시 문화 산업의 흐름을 직설적으로 드러낸 곡이다. 제목 그대로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는 가사는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구절이 됐다.

그러나 인터넷과 SNS 등 쌍방향 매체, 이른바 ‘뉴미디어’의 등장 이후 상황은 다시 뒤집혔다. 오늘날 대중은 정해진 편성표를 따라 TV를 시청하기보다 OTT나 유튜브 같은 플랫폼을 통해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 소비한다. 인플루언서와 유튜버가 콘텐츠 생산과 소통을 동시에 이끌어가는 시대가 도래해 TV 역시 한때 라디오가 걸어갔던 쇠퇴의 길을 닮아가고 있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SNS Killed the TV Star’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SNS의 시대에도 ‘라디오 스타’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라디오의 진화형이라 할 수 있는 ‘팟캐스트’가 급부상하며 음성 매체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주파수를 통해 실시간으로 송출되던 라디오와 달리 팟캐스트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에피소드를 골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생활 리듬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때 쇠퇴한 줄로만 여겨졌던 음성 매체가 다른 형식으로 부활한 셈이다.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사랑은 주파수를 타고

2006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 스타’는 이러한 사라지지 않는 라디오의 힘을 따뜻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영화는 “언제적 최곤이냐”는 조롱과 무시 속에서도 20여 년간 최곤(박중훈)의 매니저이자 1호 팬으로 곁을 지켜온 박민수(故 안성기)는 언제나 그를 ‘88년도 가수왕 최곤’이라 부르며 응원을 멈추지 않는다.

‘라디오 스타’는 개봉 후 2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스토리가 어색하거나 낡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화가 다루는 핵심 소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지방 소멸과 지역 공동체의 붕괴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그러나 영화는 지방을 ‘소멸의 공간’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지방에는 지방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영월 다방에서 일하는 김양이 가출기를 통해 엄마에게 전하는 사연, 가출한 아버지를 찾는 국밥집 아들 호영의 이야기, 영월군 유일의 록밴드 이스트리버 멤버들의 소소한 일상, 화투 규칙을 알려달라며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영월 할머니들의 모습은 도시의 방송에서는 좀처럼 담아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사연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진한 ‘사람 냄새’를 풍긴다.

물론 영화의 설정은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다소 판타지에 가깝지만 라디오가 방송국의 유일한 프로그램이자 높은 청취율을 기록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극적 효과를 위한 장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이 ‘억지스러움’은 이상하게도 밉지 않다.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진정으로 듣고 싶고,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떠나는 지방의 작은 마을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동네의 풍경은 20년 전보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됐다. 오늘을 배경으로 ‘라디오 스타’를 다시 만든다면, 과연 지금의 영월에는 이스트리버와 김양이 여전히 남아 있을지 쉽게 답하기 어렵다.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우리에게 우산을 씌워줬던 배우 안성기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7080 시대의 영광을 누렸던 가수 최곤의 재기 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숨은 주인공은 최곤이 아닌 그의 매니저 박민수다. 매일같이 사고를 치는 최곤의 뒤처리를 도맡으며 폭력 사건에 휘말린 최곤을 대신해 “제가 때린 것처럼 하겠다”고 말하는 박민수의 모습은 연예인과 매니저라는 관계를 초월해 피보다 진한 유대감을 보여준다.

자신이 짐이 될까 봐 최곤의 곁을 떠나는 박민수의 모습에서는 극 중 인물보다 배우 안성기 본인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지난 1월 5일 세상을 떠난 ‘국민배우’ 안성기의 영결식에서 아들 안다빈 씨가 낭독한 편지는 그 인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다빈아, 다빈이는 이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그래, 아빠는 다빈이가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시간을 꼭 지킬 줄 알며 실패나 슬픔을 마음의 평화로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는 야망과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고, 끝없이 도전해 보아라. (중략) 내 아들 다빈아,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란 바로 착한 사람이란 것을 잊지 말아라. 1993년 11월 아빠가.’

편지에서 그는 다섯 살 아들에게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착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마음을 담담히 전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실패와 슬픔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며, 야망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당부는 박민수라는 캐릭터의 삶과 겹쳐진다. 그렇기에 영화 속 박민수에게서 안성기가 보이고, 안성기에게서 다시 박민수가 보인다.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영화의 엔딩에서 서울로 돌아간 박민수는 결국 다시 최곤을 찾아 영월 방송국으로 향한다. 거센 장맛비 속에서 ‘미인’을 흥얼거리던 민수는 쓰고 있던 우산을 최곤에게 씌워주고, 그의 어깨는 굵은 빗물에 흠뻑 젖는다. 빗속에서도 환하게 웃던 박민수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과 겹쳐지는 배우 안성기의 미소, ‘비와 당신’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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