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2400명 한국 떠났다" 받아쓴 언론, 너도나도 기사 삭제
삭제 경위 설명하는 언론 찾기 어려워...조선일보는 삭제 안 해
"당사자가 순식간에 관찰자로" 유체이탈식 보도 행태 지적도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상속세 때문에 백만장자들이 해외로 나가고 있다는 대한상공회의소 보도자료가 부실한 근거로 뭇매를 맞은 가운데, 보도자료를 인용했던 대다수 언론이 관련 기사를 삭제했다. 독자들에게 삭제 경위를 설명하는 언론사는 찾기 어려웠다. 조선일보의 경우 대한상의 보도자료 인용 기사를 삭제하지 않았다.
대한상의는 지난 4일 부동산을 제외하고 자산 100만 달러(약 14억 원) 이상을 소유한 고액 자산가들이 2024년 1200명 국외로 빠져 나갔고, 2025년에는 2400명으로 급증할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후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일 오전 자신의 SNS를 통해 “사익 도모와 정부 정책 공격을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해 유포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대한상공회의소가 이런 짓을 공개적으로 벌인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며 프레시안의 <존재하지도 않는 '백만장자 탈한국'…철지난 '떡밥' 덥석 문 보수언론들>이란 기사를 언급했다.
해당 기사에는 <“50% 웃도는 상속세 낼 바에” 부자 2400명 한국 떠났다>(조선일보), <“상속세 50% 못내” 韓 떠나는 수퍼리치들…세계 4번째 규모 이탈>(중앙일보), <50% 넘는 상속세에…부자 2400명 한국 떠났다>(동아일보), <'상속세 더는 못 참아'…부자들 미련 없이 한국 떠났다>(한국경제), <부자들의 선택…2400명이 한국을 떠난 이유>(서울경제), <상속세 부담에 脫한국 급증 … 국부 유출 부추기는 징벌적 세제>(매일경제) 기사 제목이 언급됐다.

9일 미디어오늘 확인 결과 문제적 기사로 지목된 위의 기사들은 조선일보를 제외하고 모두 삭제됐다. 이 대통령 비판 이후 대한상의가 “2월4일자 '상속세수 전망분석 및 납부방식 다양화 효과 연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 내용 중 고액자산가 유출 관련 외부 통계를 충분한 검증 없이 인용하여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한 데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히자 언론이 기사 삭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대한상의는 “향후 이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엄중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자료 작성 시 사실관계 및 통계의 정확성 등에 대해 충실히 검증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는데,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쓴 언론도 책임을 면하긴 어렵다. 논란의 핵심에 있는 헨리앤파트너스 보고서에는 한국 부자의 유출 배경으로 상속세를 꼽은 대목도 없었기 때문에 언론이 한 번만 원문을 확인했다면 보도자료 문제를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같은 내용의 헨리앤파트너스 보고서를 인용해 지난해 10월 작성된 <부자들 韓탈출 충격 보고서…“올해 2400명 떠나 21조 유출” 왜>(중앙일보)와 같은 기사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몇몇 언론사들의 삭제 조치가 부정적 여론을 면피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사 삭제 외에 사과문 등 추가적인 대응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앞서 한국경제는 대한상의 보도자료 통계를 인용해 지난 3일 <요지부동 상속세율에 납부 기간이라도 늘려달라는 경제계 호소>이란 사설을 냈고, 헤럴드경제는 지난 4일 <상속세 납부 방식 유연화, '부자 엑소더스' 현실적 대안>이란 사설을 냈다. 이데일리는 지난 5일 <세금 무서워 韓 떠나는 부자들, 상속세 손질 말 뿐인가> 사설을 냈다. 언론계가 경제지를 중심으로 사설까지 내며 정부 정책을 비판했지만 정작 유감 표명에는 소극적이다.

이런 가운데 조선일보는 기사를 삭제하지도 않았다. 해당 신문은 “지난해 한국을 떠난 고액 자산가 수가 전년의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난 240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가 해외 이탈이 가속화되는 배경으로 50%를 웃도는 상속세 부담이 지목되면서, 납부 방식 전반을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영국 이민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에 따르면 한국의 고액 자산가 순유출 규모는 2024년 1200명에서 2025년 2400명으로 급증했다. 대한상의는 높은 상속세율이 자본의 해외 이전뿐 아니라 국내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며 문제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는데, 독자 입장에서 보면 근거 없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미디어오늘은 조선일보측에 '타사와 달리 기사를 삭제하지 않은 배경'을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공영방송 KBS의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앞서 KBS는 <한국 떠나는 슈퍼리치들…'세계 4번째' 규모, 왜?>란 제목의 기사를 삭제했다. 이를 두고 김의철 전 KBS사장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KBS의 “평생 일군 재산 들고 탈조선”이란 자막을 거론하며 “사실 전달이라기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정치적 언어에 가까웠다”며 “해당 기사는 아무런 공지 없이 갑자기 삭제됐다. 설명 없는 삭제는 책임을 진 것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김 전 사장은 “7일 KBS는 이재명 대통령의 SNS 글을 또 하나의 정쟁 프레임으로 보도하면서 전날까지 '가짜뉴스'를 생산·유포한 보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사과도 없었다. 당사자가 순식간에 관찰자로 바뀐 셈”이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유체이탈'식 태도는 비단 공영방송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세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지난 3년간 평균 해외이주 신고 인원은 2904명이며, 이중 자산 10억 원 이상 인원은 연평균 139명이었다. 임광현 국세청장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같은 통계를 인용하며 “대한상의가 인용한 보고서는 한국인 백만장자의 순유출이 작년 2400명으로 최근 1년간 2배 증가하였다고 밝혔으나, 해외 이주자 중 10억 원 이상 보유자의 인원과 증가율은 모두 사실과 매우 다르다”고 지적했다.
임광현 청장은 “특히 최근 3년 평균 상속세가 없는 국가로 이주한 사람의 비율을 보면 전체는 39%이나, 10억원 이상은 25%로서 전체비율 보다 오히려 낮다”며 “재산이 많다고 해서 상속세가 없는 국가로 이주하는 경향성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8일 “법정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가 공신력도 없고 사실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정보를 유통함으로써 국민과 시장, 그리고 정부 정책 전반에 심각한 혼선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며 “검증 없이 받아쓴 일부 언론의 행태도 지탄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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