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와 제주도

무안공항 활주로 끝에 '콘크리트 둔덕이 없었다면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국토교통부 산하 항공철도조사위원회의 충돌 시뮬레이션 보고서가 지난 1월 초 언론에 공개됐을 때, 아쉬움의 충격이 컸습니다. 승무원 두 명만 살아남고 179명이 숨진 제주항공 추락사고의 비극적 결과와, 사전에 공항 설계와 안전 기준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전혀 다른 결말로 이어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결과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시뮬레이션에는 화재와 폭발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콘크리트 둔덕이 없었더라도 비행기가 공항 담장을 뚫고 논밭이나 들판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큽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동체가 꼬리 부분만 남기고 형체도 없이 박살 나지 않았다면, 많은 승객이 구조됐을 개연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제주항공 추락사고의 전개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원인은 비교적 분명해집니다. 조류 충돌로 엔진 기능이 마비되면서 동체 착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활주로 끝에 설치된 콘크리트 둔덕과 정면 충돌하며 비행기가 완전히 파괴됐다는 점입니다. 이 사고는 단순한 항공기 사고라기보다 공항의 입지와 설계, 안전 관리가 중첩돼 빚어진 '공항발 참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안항공 참사가 더 무겁게 다가온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습니다.
2024년 12월 29일 아침 9시 조금 지나,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택시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향하던 중 라디오 속보를 들었습니다. "태국을 출발한 제주항공 여객기가 무안공항에 접근하던 중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희생자 발생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짧은 속보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큰 사고구나. 사망자가 꽤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안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서 1980년 11월 김포공항 출입 기자로 일할 때 취재했던 비행기 추락사고가 회상되었습니다.
LA발 대한항공 보잉747점보기가 새벽 안개 속에 김포공항에 착륙하다 활주로 못 미쳐서 맨땅에 부딪치면서 불길에 휩싸였고 탑승자가 비상 탈출하는 대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아수라장이된 기내에서 승무원들의 용기와 기지에 의해 탑승자 226명중 211명이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승객 9명과 기장을 포함한 승무원 6명이 아쉽게도 사망했습니다. 그날 사고 현장의 새까맣게 타버린 거대한 비행기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월이 흘렀어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무안공항 추락사고 뉴스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항공 사고는 한순간의 뉴스가 아니라,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로 이어지는 긴 질문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제주도로도 향합니다. 무안공항 참사를 보면서 광주 전남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마 제주도 주민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주항공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있고, 공항과 비행기 여행에 대한 뉴스를 자주 들으면서 살아온 게 제주도 주민들입니다.
제주도 주민들에게 비행기는 단순한 여행 수단이 아닙니다. 육지 사람에게 비행기가 선택이라면, 제주 사람에게는 생존에 가까운 필수 인프라입니다. 병원 진료를 받으러, 입시를 치르러, 취업 면접을 보러, 군 복무를 하러, 갑작스런 부고를 듣고 서둘러 섬을 떠날 때 우리는 공항으로 향합니다. 제주에서 하늘길은 관광의 길이기 전에 생활의 길인 것입니다.
그만큼 제주도 사람들은 항공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노선이 늘었다, 항공권이 싸졌다, 관광객이 몇 명 늘었다는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는 늘 뒤로 밀려 있었습니다.
"이 하늘길은 안전한가."
항공 여행의 본질은 속도가 아니라 안전입니다. 안전이 전제되지 않으면 비행기 여행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안공항 참사는 단지 한 항공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항공 안전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되묻게 만들었습니다. 항공 안전은 조종사의 기량이나 기체 결함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항이라는 시설의 설계와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공항은 단순한 토목 건설 사업이 아닙니다. 활주로 길이, 종단 안전구역의 확보, 지형과 바람의 방향, 조류 이동, 주변 장애물 관리까지 모든 요소가 물리학과 확률, 데이터 위에 세워지는 과학의 영역입니다. 한 번의 판단 실수가 수십, 수백 명의 생명과 직결되는 공간이 바로 공항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공항이 종종 지역 숙원사업, 즉 정치적 논리로 소비됩니다. "우리 지역에도 공항 하나"라는 구호는 지자체 선거를 앞둔 지금도 뜨거운 관심사입니다.
공항은 경제를 살리는 시설이기 이전에, 생명을 맡기는 시설입니다. 활주로 하나, 유도로 하나, 둔덕 하나가 단순한 토목 구조물이 아니라 대체불가한 안전장치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항공 인프라를 둘러싼 논의는 정치의 문법이 아니라 과학과 안전의 언어로 이야기돼야 마땅합니다.
이 문제는 항공 의존도가 높은 제주에서 더욱 절박합니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면 하늘에서 대기하는 게 다반사일 정도로 공항은 포화 상태에 가깝고, 제2공항을 둘러싼 논쟁도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반을 떠나 우리가 먼저 합의해야 할 전제는 분명합니다. 공항이 더 필요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만약 만든다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기준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핵심 질문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항공 의존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라면, 안전 기준 역시 가장 높은 곳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세계 어느 항공사 비행기라도 아무 조건 없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고, 심지어 미국 대통령 전용기처럼 최고 수준의 안전을 요구하는 항공기조차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공항. 제주가 지향해야 할 공항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공항은 지역 숙원사업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국제 안전 기준을 선도하는 인프라여야 합니다.
그런데 항공 안전의 위험 목록에는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바로 기후변화입니다.
대기 흐름이 불안정해지면서 예측이 어려운 난기류가 늘고 있고, 폭염은 공기 밀도를 떨어뜨려 비행기의 이륙 성능을 저하시킵니다. 집중호우는 활주로 제동 조건을 악화시키고, 태풍의 강도와 경로는 과거 통계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습니다. 하늘길조차 예전과 같지 않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에서 공항은 그야말로 생명선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선을 위협하는 변수에 기후변화가 추가되었습니다. 공항의 입지, 설계, 운영 기준은 과거 평균이 아니라 미래의 기준으로 다시 설계되어야 합니다. 세계 주요 공항들은 이미 기후 리스크를 반영해 활주로 배수 능력을 재설계하고, 강풍·돌풍 데이터를 반영한 접근 절차를 도입하며 안전 기준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제주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관광객 수와 노선 확대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 공항이 앞으로 30년, 50년의 기후와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비행기를 떠나 살 수 없게 된 섬, 제주. 그 제주가 공항 안전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준 위에 서 있어야합니다. 정치의 시간표가 아니라 과학의 시간표로 공항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무안공항 참사의 비극 앞에서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의 안전한 하늘길은 곧 제주의 미래입니다.

제주 출신으로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해 주필까지 역임한 언론인이다. 뉴욕특파원과 LA한국일보 기자를 거치면서 유엔과 환경문제, 실리콘밸리, 미국에너지산업 등을 취재한 경험을 살려 각종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국제녹색섬포럼 이사장, 제주그린빅뱅추진 공동위원장, 제주대 한림원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주 청년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설립한 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HRA)에 19년째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0.6도(2003)', '지구 온난화의 부메랑'(2007·공저), '고마워라 인생아'(2009),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