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의 전략가’ 이해찬, 최후까지 투사로 떠나다

김형민 2026. 2. 9.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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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은 평생 안주하지 않은 뜨거운 투사였다. 고문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몸으로 해외 출장을 나섰던 그의 죽음은 객사(客死)가 아니라 전사(戰死)로 기억될 만하다.
고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참여정부 국무총리 시절 모습.ⓒ시사IN 포토

이해찬 전 총리가 별세했다. 향년 74세.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지만, 고 이해찬 총리의 ‘난 자리’는 결코 얕지도, 얇지도, 좁지도 않다. 깊고 두텁고 넓다.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개인의 입장과 의견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의 일흔넷 인생, 특히 스물 이후의 인생은 대한민국 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게 맞물려 있다. 다음의 내용은 그가 마주했던,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한국 현대사의 희로애락 그득한 장면 장면들의 되새김이다.

이해찬은 서울대 사회학과 72학번이다. 그해 가을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제4공화국, 긴급조치 공화국의 막이 오른다. 유신 이전까지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한 적이 없었다. 술 먹으려고 친구들 기다리던 어느 날, 갑자기 총 든 군인들이 몰려왔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며칠 서울에 머물던 이해찬은 하릴없이 고향으로 내려간다. 아버지는 충남 청양 면장을 오래 지냈다. 6·25의 난리통에 동네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인민군으로부터도 무사했고, 서슬 퍼런 부역자 처벌 와중에도 ‘월북자 가족’ 신원보증도 서슴없던 보기 드문 면장이었다. 이 아버지는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에게 호통을 친다.

“지금 유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다르다. 박정희가 총통을 하려고 이러는 거다. 4·19가 일어난 게 10여 년 전이다. 학생들이 이리 집에 와버리면 그 4·19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데모하지 말라고 딸 머리 깎고 아들 다리몽둥이 부러뜨린 부모 얘기는 많지만 학교가 문을 닫아 집에 온 아들에게 ‘왜 데모 안 하니’ 식으로 호통 친 아버지는 그야말로 희귀했으리라. 어영부영 내려왔던 이해찬은 마치 떡 썰기와 글씨 쓰기 내기에서 참패한 한석봉처럼 바로 다음 날 가져온 짐 그대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학교에서 10월 유신 후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를 주도한 이해찬은 용케 체포를 면했지만, 1974년 민청학련 관련 성명서를 배포하려다가 결국 경찰에 잡혀간다. 경찰은 이철, 유인태 등 고학번 주동들을 대라며 엄청난 고문을 퍼부었다. 이해찬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혹독한 고문이었다. 불어라, 모른다 승강이하던 중 경찰 하나가 난로에서 연탄집게를 집어들었다. “눈을 빼버린다.” 이해찬은 그 순간이 가장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그 경찰에게는, 훗날 ‘부엉이’라는 별명을 얻게 될 이해찬의 날카로운 눈매가 거슬렸던 것일까.

번뜩이는 재주와 발군의 추진력

하지만 1979년 ‘명동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돼 끌려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극심한 고문을 당했던 백기완 선생의 경우 며칠 사이에 체중 40㎏이 빠져버릴 정도였으니 그 참상은 알아서 짐작하자. 거기서 겨우 놓여나고 몇 달 뒤 이해찬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다. ‘7말 8초’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모든 사건에 이해찬은 발을 얹었던 셈이다. 이런 고통을 당하고 그 몸과 맘이 성할 사람 뉘 있으랴.

1998년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에게 보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도 이해찬은 옥살이 사이사이에 장가도 가고 출판사를 차리거나 서점을 운영하며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출판사 ‘돌베개’의 창립자가 그다. 다른 출판사를 위해 도서 기획도 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스테디셀러가 된 책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다. 나치에 저항한 독일 대학생 ‘백장미단’ 단원들의 투쟁과 죽음을 그린 이 걸작은 1980년대를 관통하는 문제작이었다. 공안 당국도 이 책을 알아모셨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공소장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교재로 독후감을 발표하면서 독일 의학도들의 행동을 본받자고 한 것”이 범죄의 근거로까지 나열된 것은 한 예에 불과했다. 수많은 청춘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필자도 포함된다) 눈물을 흘리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어 한 것을 대신한 것일 뿐이다”라는 백장미 단원의 항변과 “자유여 영원하라”는 단두대에서의 절규를 기억하면서. 그 책을 펴내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이 이해찬이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눈에 돋은 가시마다 이해찬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그리고 6월 항쟁을 주도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등등 기나긴 이름의 조직들마다 그의 이름이 굵게 쓰여 있다. 잔인한 공권력과 온갖 드잡이를 벌이는 와중에도 그는 조직 운용과 관리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김지하 같은 이에게 막걸리 받아주고 난(蘭) 그림을 받아와 그걸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고, ‘5공화국 보도지침’이라는 특급 정보를 손에 쥐었을 때 이걸 그냥 폭로하지 않고, 잡지 〈말〉을 활용해 잡지 판매 수익을 얻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던 〈말〉 특집호 ‘보도지침’ 편은 민통련의 재정에 톡톡히 기여했다. 번뜩이는 재주였고 추진력은 발군이었다.

2004년 6월30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왼쪽)에게 임명장을 받는 이해찬 신임 국무총리. ⓒ연합뉴스

1987년 6월 항쟁과 6공화국 출범 이후 제도권에 들어온 뒤에도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돼 개인적으로 ‘7선 의원’의 위업을 달성하고, 수십 번의 선거를 지휘하고, 무려 4명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 네 대통령 모두의 ‘핵심’이었던 사람이 그 말고 누가 있었을까.

그런데 가끔 자신의 역량과 감각을 과신해서인지 그는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 당시, 1969년 무장공비 사살 사진을 광주항쟁 현장 사진으로 내밀었다가 낭패를 봤던 것은 초선의원 시절의 뼈아픈 장면이다. 교육부 장관으로서(청와대에서 교육부 장관 임명을 통보받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잘못 통보한 줄 알았다고 한다)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방향은 옳았는지 모르나 너무나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라는 비판 역시 엄존하며 ‘이해찬 정치’의 논쟁적 대목으로 남아 있다. ‘이해찬 세대’의 원망과 함께.

늦재미에 밤새는 줄 모르는 것이야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이지만 그의 골프 사랑은 너무도 유별났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묘하게 틈만 나면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내 언론과 야당의 표적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의 총기가 엷어졌나 의심했고, 문재인 정권 초반 ‘20년 집권론’을 펼 때는 자신감을 넘어 오만해졌다 싶어 나 자신이 ‘버럭 해찬’에게 ‘버럭’ 했던 기억도 난다. ‘보자 보자 하니까 누가 당신들 이뻐서 찍어준 줄 아나.’

현대사 데운 거대한 불쏘시개

그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던 것이 2020년 〈시사IN〉에 실린 인터뷰였다(〈시사IN〉 제679호 “보수가 너무 세기 때문에 20년 집권이 필요합니다” 기사 참조). 인터뷰 초반에는 이마를 짚었다.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정조를 ‘개혁 군주’로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고, 봉건왕조의 개혁을 공화국 역사에 덧대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서 조금은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복원도 아니고, 복원을 시도해볼 틈새. 그 틈새 정도만 만들려고 해도 20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개혁 정책이 뿌리내리려면 그 정도(20년)는 걸립니다. 독일이나 영국이나 또는 북유럽 국가들에서 자리 잡은 개혁 정책을 보면 사민당이나 노동당이 20~30년씩 집권하면서 만들어낸 겁니다. (…) 보수가 너무 세기 때문에 20년 집권이 필요합니다.”

1월27일 문재인 전 대통령 내외가 고 이해찬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동조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20년 집권론’이 오만함보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흔을 바라보던 이해찬이,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유신정권에 맞섰던 그 청년의 모습으로, 여전히 높고도 튼튼한 벽을 향해 달려드는 싸움꾼이자 전략가로 그때껏 살고 있었다는 사실일 터이다. 그의 싸움이 과거처럼 정의로웠는지, 그의 전략이 그의 과거처럼 미래에서도 성공을 거둘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그는 칠십 평생 안일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은 뜨거운 투사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받았던 김근태처럼, 수전증을 비롯한 고문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몸으로 해외 출장길에 나섰던 그는 객사(客死)가 아니라 전사(戰死)했는지도 모른다. 미칠 것같이 뜨거웠던 한국 현대사를 데운 커다란 불쏘시개 중 하나, 이해찬 전 총리의 명복을 빈다.

김형민 (역사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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