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이겨 먹으려던 맥아더… 후버-루스벨트-트루먼에 ‘3연속 불충’

이영창 2026. 2. 9.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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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한국전쟁의 장군 열전]
더글러스 맥아더 上: 12면체 인간의 초상 ②
편집자주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는 할 말이 참 많은 인물입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3개월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 글은 두 번째입니다.

※'12면체 인간의 초상 1'에서 이어집니다.

연관기사
• 최고의 재능, 최악의 마마보이… 맥아더, ‘위대한 명장’인가 ‘용렬한 졸장’인가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4490000739)
시각물_다면체인간맥아더
“나는 맥아더가 멍청한 개자식(sob)이라서 해고한 게 아니다. 그가 대통령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자식인 건 사실이지만.”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제4면 명령불복: 대통령을 거스른 장군

1차대전 때 맥아더는 규정을 지키지 않는 정도의 ‘일탈 군인’이었지만, 점점 중책을 맡으면서 군인이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위험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인 1932년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다. 배고픔(대공황)에 지쳐 워싱턴에 모인 제대군인들이 행진을 시작했을 때, 사태 악화를 막으려던 후버 대통령은 현장에 있던 맥아더에게 전령을 보내 “다리 너머로는 진압 병력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령이 전달한 명령을 바쁘다고 못 들은 척하면서, 진압군을 다리 너머로 보내 강제 해산을 실시했다. 진압군은 제대군인과 그 가족들이 살던 캠프촌에 불을 지르고 최루가스를 뿌렸다. 최루가스를 맡은 어린이 한 명이 목숨을 잃고, 애완토끼를 지키려던 소년 한 명이 군인들 대검에 찔리는 등 사태는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번졌다. 이 잔혹한 진압은 나중에 후버가 재선에 실패하고 루스벨트가 32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도화선이 됐다.

후버의 다음 대통령 루스벨트에게도 불충을 저질렀다. 경제대공황 와중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국방예산을 깎아 다른 분야로 돌리려고 했는데, 지나친 예산 삭감에 반대한 참모총장 맥아더는 대통령 앞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가 다음 전쟁에서 패하여 미국 청년의 배에 총검이 꽂히고 적의 군홧발이 목을 누를 때, 그가 저주하며 내뱉는 이름이 맥아더가 아니라 루스벨트이길 바랍니다.” 부하에게 이런 저주를 들었음에도, 루스벨트는 사표를 내려던 맥아더를 막아세우며 “예산도 그대로, 귀관도 그대로 두겠네”라며 맥아더의 항변을 받아들였다. 이게 1934년의 일이다. 실제 루스벨트는 이 일이 있고 나서도 맥아더에게 1년이나 더 육군참모총장 직을 맡겼다. 맥아더도 대통령에게 이런 악담을 퍼부었던 게 심리적으로 부담은 됐는지, 나중에 회고록에선 “백악관을 나오자마자 현관에서 구토를 했다”고 돌이켰다.

다만 이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를 용서했던 것은 그의 능력이나 자질을 높게 평가했던 부분도 있겠지만, 군복을 벗은 뒤 자신의 대선 맞상대가 될 수도 있는 맥아더를 가까이에 두고 관리하려 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능수능란한 ‘정치 9단’ 루스벨트는 큰 이익을 위해 자기의 개인적 감정을 꾹 누르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왼쪽부터) 미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대장, 체스터 니미츠 해군 제독이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친구는 가까이, 그러나 적은 더 가까이에.”
(영화 대부 '돈 콜레오네')

그러나 재임 기간이 5년에 이른 맥아더를 언제까지 참모총장에 둘 수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보냈다. 마닐라로 이동해 워싱턴 통제에서 멀어진 뒤부터, 맥아더의 명령 무시는 그 정도를 더해 갔다. 특히 일본 점령기(1945~1951년) 때는 미국 정부 소속 공무원이 아니라 마치 일본을 직접 다스리는 절대군주 내지는 총독처럼 굴었다. 당시 맥아더의 위상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1945년 9월 27일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텐노)의 만남이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에게 텐노는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온 현신(現神)과 같은 존재였으나, 짝다리를 짚은 장신의 맥아더와 차렷 자세로 경직된 히로히토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맥아더는 이 사진으로 자신이 텐노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점을 한 방에 각인시켰다.

이 기간 대통령 트루먼이 맥아더 도쿄사령부에 많은 재량권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맥아더는 그 재량권을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한 뒤 워싱턴의 재가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곤 했다. 당시 맥아더와 합을 맞춘 주일 미 대사 윌리엄 시볼드는 “미국 역사상 그렇게 거대하고 절대적인 권력이 한 개인 수중이 맡겨진 사례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맥아더의 유아독존 성격에 더해 본국 행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맥아더의 ‘자율’은 결국 대통령 및 합동참모본부의 지시마저 무시하는 ‘항명’의 단계에 이른다. 6·25 전쟁 내내 트루먼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맥아더의 독선적 모습은 도쿄 시절 ‘쇼군’ 생활 동안 잉태된 측면이 크다.

결국 맥아더는 후버-루스벨트-트루먼 등 세 명 대통령의 명령, 그리고 문민통제의 대원칙을 연속으로 거스른 희대의 ‘불충장군’으로 남게 됐다. 맥아더 하면 인천상륙작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인 입장에서야 6·25 전쟁 중 맥아더를 해임한 것이 매우 뼈아프고 아쉬운 결정일 수 있겠으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1951년 4월 트루먼의 유엔군사령관 해임은 10년 이상 여러 사건을 통해 누적된 맥아더의 고질적 명령 불복종에서 비롯된 사필귀정이었다. 오히려 너무 늦은 조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가운데)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조지 마셜(오른쪽) 미 육군참모총장이 1943년 작전 지역을 함께 둘러보고 있다. 왼쪽의 중장은 당시 맥아더 휘하의 6군사령관 월터 크루거. 미 해군
“맥아더가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했다. 아시아는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워싱턴의 유럽 편향을 병적으로 질투했다. 결국 유럽 전체, 특히 영국인들이 자신을 향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확신하게 됐다.”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

제5면 피해의식: 이게 다 마셜 때문이다

자기애 강한 나르시시스트(자기도취자)들은 자기 모습과 성취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즘도 일종의 심리적 왜곡 현상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지 못할 때 이들은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기보다 ‘저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책임을 밖으로 돌린다. 시기, 질투, 열등감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맥아더처럼 걸출한 능력을 갖춘 야심가일수록 ‘내가 잘못해서 실패했을 리 없다’며 자신만의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다. 맥아더의 위대함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피해의식도 이런 심리적 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맥아더가 평생 ‘나를 공격하는 집단’이라고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상은 워싱턴의 ‘유럽 우선주의자’들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호주 필리핀 일본 한국) 임무를 많이 담당했던 맥아더는 미국의 핵심 국가 이익이 아시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유럽을 우선하던 미국 외교 정책 결정자들은 맥아더의 이런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2차대전 중 미국의 병력·무기·자원이 유럽에 집중될 때마다, 맥아더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주변 참모들에게 대통령 루스벨트에 대한 증오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가 루스벨트만큼 증오한 대상이 있으니 바로 마셜(당시 육군참모총장)이다. 맥아더의 눈에 마셜은 ‘영국인들에게 포섭된 유럽 우선주의자’ 그 자체였다. 마셜에 대한 반감은 1차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는 무지개사단 참모장·여단장이었고, 마셜은 유럽원정군 최고사령관 퍼싱의 참모로 일했다. 맥아더는 ‘장교들을 전출시키라’거나 ‘병력을 지원하라’는 총사령부의 정상적인 지시를 부당한 간섭으로 간주했고, 책상머리에 앉은 퍼싱 사령부 장교들이 전투장교인 자신을 질투한다고 믿었다. 이때 형성된 마셜에 대한 반감은 수십 년간 이어지는데, 맥아더가 참모총장 시절 끝내 마셜의 장성 승진을 거부하거나 2차대전 때 참모총장 마셜의 명령을 경시한 것은 이런 개인적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사 구분이 철저했던 마셜은 1942년 필리핀 전선 패장 맥아더를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 수훈자로 추천했고, 한국전쟁에서도 맥아더를 해임하려는 트루먼에게 신중한 대응을 건의했다.

맥아더가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은 거의 맹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초 맥아더를 만난 미국 극작가 로버트 셔우드(루스벨트의 연설 원고를 쓰기도 했음)의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매우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와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워싱턴 정책 형성을 좌우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결국 셔우드는 맥아더 사령부가 “극심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을 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와 체스터 니미츠 사령부의 공세 경로. 맥아더는 필리핀 섬을 차례차례 수복하며 일본으로 북상하고자 했지만, 니미츠는 태평양 일부 섬만 확보한 뒤 일본 본토로 곧장 진격하려고 했다. 프리츠커 군사박물관

그런 맥아더가 보기에 ‘유럽파’ 말고도 자신의 다리를 잡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해군이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태평양 전력은 크게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가 지휘하는 태평양지역(POA) 사령부 △육군 원수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지역(SWPA) 사령부로 양분돼 있었다. 해군·해병대 위주의 니미츠 사령부는 마리아나 제도와 이오지마 등 태평양 주요 섬들을 거쳐 일본을 직접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고, 육군 위주 맥아더 사령부는 뉴기니섬과 필리핀 제도를 차례차례 회복한 뒤 대만과 일본 본토로 북상하는 루트를 택했다. 맥아더가 굳이 어려운 길을 고집했던 이면에는, 맥아더 자신이 필리핀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나 필리핀 정치인들과 맺었던 개인적 인연이 반영된 것이 분명하다. 누가 봐도 니미츠의 접근법이 효율적이었지만, 맥아더의 위상이나 육군의 체면 등을 고려해 루스벨트는 양쪽을 모두 공략하는 것으로 어정쩡한 합의를 유도했다. 이 양면 접근법은 당시엔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전력을 분산시켜 오히려 일본의 패망을 앞당긴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맥아더 입장에선 자기보다 많은 병력을 받고 더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니미츠 사령부가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그 어떤 지휘관도 나처럼 지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지인에게 보낸 편지)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맥아더의 자기변호는 사실과 달랐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의 전투 성과를 연구한 역사학자 스탠리 포크는 “(맥아더의 말과 달리) 맥아더는 자신이 벌인 대부분 전투에서 적군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동원했다”고 결론 냈다. 니미츠에 비해 낮았던 자신의 위상, 막대한 자원 투입에 대비해 신통치 않았던 전과를 능숙한 ‘언론 플레이’로 보충했던 셈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체스터 니미츠 태평양 사령관이 지도를 보며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는 자신이 겪는 곤란들을 아이젠하워(유럽 전선 총사령관) 탓으로 돌렸다.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에 반하는 자료를 백악관에 넘기며 자기 지위를 높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중에서)

맥아더의 근거 없는 ‘피해의식’은 자연스럽게 ‘책임 전가’로 이어졌다. 자신이 총사령관으로 책임져야 할 패배·졸전의 원인을 부하장군 혹은 워싱턴 탓으로 돌리는 일이 잦았다. 책임 전가는 부하·동맹·동료·상관·대통령을 가리지 않고 반복됐다.

대표적 사례가 2차대전 미군의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였던 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 때다. 12월 8일(하와이 시간 7일) 맥아더는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고서도 10시간 이상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일본군에게 루손섬 전략 요충지였던 클라크 필드 비행장 폭격을 허용하고 만다. 이 공습 한 방으로 미군은 일본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략자산인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를 대부분 잃었다. 그래서 일본의 필리핀 침공은 교전 첫날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자신의 준비 부족과 늑장 대응 때문에 입은 손실을 워싱턴 정부 책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맥아더는 부하를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을 준비가 항상 돼 있었다. 거의 여론의 제단 위에 바쳐질 뻔하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장군이 바로 초대 미8군사령관(태평양 전선) 아이첼버거다. 유럽 전선에서 태평양으로 차출된 아이첼버거는 1942년 말 부나-고나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밥, 부나를 차지하게, 아니면 살아 돌아오지 말게”라며 협박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다. 정작 아이첼버거가 긴 혈투 끝에 승리를 따내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에게 즉각 포상을 하지 않고 1주일이 지나서야 훈장을 수여했다. 아이첼버거는 이를 두고 “뉴기니의 첫 승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아이첼버거가 아니라 맥아더를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아이첼버거의 생각이 맞았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졌더라면, 맥아더 사령부는 종군기자들에게 현장 지휘관 아이첼버거의 이름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 해전으로 꼽히는 1944년 레이테만 해전(니미츠·맥아더 합동작전)에서, 맥아더는 사마르 전투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을 단일 지휘권 부재 탓으로 돌리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다른 연합국에 책임을 넘긴 사례도 있는데, 1942년 뉴기니 지역 작전 실패를 호주군의 잘못으로 왜곡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맹에 책임을 넘긴 수준으로 그친 게 아니라, 동맹국의 전공을 가로채려 했다는 의심을 산 사례도 발견된다. 맥아더는 언론에 제공한 보도자료를 통해 미군의 공적을 언급할 때는 부대 이름을 정확하게 표시한 반면, 호주·뉴질랜드군 덕분에 승리했을 때는 그냥 뭉뚱그려서 ‘연합군’이라고 언급했다.

경제대공황의 굶주림을 참다 못해 정부에 추가수당(보너스)을 요구하러 모인 제대군인 및 가족들이 1932년 여름 워싱턴 의회의사당 잔디밭에서 쉬고 있다. 이들의 수도 시위와 정부의 강제 진압을 '보너스 아미' 사건이라고 부른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범죄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한국전쟁 내내 한국 땅에서 단 하룻밤도 자지 않았고, 가끔 일본에서 날아와 사진 촬영이나 공중 정찰을 하는 게 전부였다.”
(미 역사저술가 햄프턴 사이즈)

제6면 확증편향: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맥아더의 자만감과 피해의식은 자연히 그의 머리를 굳게 만들었다. 광범위한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전구사령관이라면 응당 부지런히 첩보를 수집하고, 날것의 첩보를 편견 없이 분석·가공해 풍부한 정보를 생산하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렸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맥아더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고, 자기 생각을 거스르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뒷전으로 돌렸다. 그가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이었고 자신의 선입견에만 의존했다.

그의 위험한 확증편향이 처음으로 국가적 문제가 된 것은 1932년 보너스 아미 사건(대공황 기간 제대군인들의 수당 요구 시위)이다. 퇴역 군인들은 배가 고파 수도 워싱턴에 모였지만, 육군참모총장 맥아더는 이들이 제대군인이 아니라 사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한 중범죄 전과자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인 군중 97%가 제대군인이라는 정부부처(재향군인관리국) 실증조사가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믿지 않았다. 반면 ‘시위대가 참모총장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는 뜬소문을, 맥아더는 믿었다. 그래서 무자비한 진압을 강행했다. 그러나 모두 맥아더의 오판이었다. 맥아더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전기작가 맨체스터도 이 장면에선 “오직 굶주린 미국인들이 있었을 뿐”이라며 맥아더를 비판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을 준비하지 못한 것도 이 확증편향 때문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적어도 일본이 1942년 4월까지는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에 반하는 첩보가 계속 들어왔음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공격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일본 해군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포착되고, 11월 27일 육군부에서 전쟁 경보를 받았음에도, 일본이 벌써 공격할 리는 없다고 믿었다. 심지어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상황에서도 ‘하와이와 달리 필리핀은 중립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며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증언(당시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있다. 눈앞의 사실과 부하들의 첩보보다, 자신의 직감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1944년 태평양 전선 펠렐리우 전투 장면. 미 해군 전투기 F6F 헬캣이 일본군 지역을 폭격하고 있다. 미 해군

편견으로 인한 잘못된 추론 탓에 큰 실패를 맛봤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했으나, 맥아더는 같은 실수를 또 반복했다. 1944년 9~11월 남태평양 팔라우 인근에서 벌어진 펠렐리우 전투가 바로 그 예다. 뉴기니를 점령한 맥아더는 펠렐리우섬을 필리핀 상륙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지만, 니미츠와 윌리엄 홀시 등 해군 제독들은 “굳이 이 섬을 차지하지 않고도 일본 본토를 바로 공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작전을 반대했다. 결국 필리핀 없이는 일본으로 못 간다는 맥아더의 고집 때문에 펠렐리우 공략은 시작됐는데, 두 달간 전투에서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 때문에 미군은 무려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지나치게 희생이 컸던 전투였음에도, 정작 이 전투 후 필리핀 공략이 너무 쉽게 성공하는 바람에 미군은 펠렐리우를 써먹지도 못하고 서둘러 일본 본토 쪽으로 북상해야 했다.

여기서 전구사령관의 반복되는 옹고집을 제어하지 못한 임명권자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확증편향과 전략적 식견 부재가 이 정도로 심각하다면 해임하는 게 옳았겠지만,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순교자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생각에서 끝내 맥아더를 워싱턴으로 소환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맥아더 문제를 순수하게 군사적 입장에서 본 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맥아더의 다른 장점과 대중적 인기가 결국 그의 군 경력을 연장시켜 준 셈이다. 결국 기고만장한 맥아더는 그 뒤로도 자기 생각대로 전쟁을 지휘했고, 그 폐해는 6년 후 한반도에서 극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 맥아더의 인의 장막, 과소평가, 임기응변을 다룬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2월 12일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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