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세월호·무안까지 37년 ’119′에 화답… “재난과 후회없이 싸웠다”

김윤덕 기자 2026. 2. 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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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수많은 생명 구한 ‘無名 영웅’ 퇴임
조양현 전남소방본부 119 구조대장
퇴임 후 가족이 있는 여수로 돌아온 조양현 대장을 소호동 앞바다에서 만났다. 사진을 위해 정복을 다시 꺼내 입은 그는 "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방관이었다"고 했다. /김영근 기자

소호 앞바다로 가는 길 곳곳에 거물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현수막이 나부꼈다. 이순신 장검(長劍)을 본떠 세웠다는 선소대교 아래에서 조양현 대장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다부진 체구의 이 사내는, 한 달 전 37년 소방관 삶을 마친 뒤 가족이 있는 여수로 돌아왔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때 179명 희생자 수습을 진두지휘한 전남119특수대응단 구조대장. 마지막 뼛조각까지 찾아내려 20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색해 유족들로부터 눈물의 감사 인사를 받은 ‘영웅’이다.

무안뿐 아니다. 스물세 살에 소방복을 입고 삼풍백화점 붕괴(1995), 여수출입국관리소 화재(2007), 세월호 침몰(2014), 경북 산불(2025)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든 재난 현장을 누볐다. 근사한 퇴임식은 없었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소방관이었다”며 웃었다. “119를 누르는 손길엔 ‘당신이 날 구해줄 것을 믿습니다’라는 절박함이 담겨 있으니까요. 단 한번도 좋은 일로 달려가본 적 없지만, 불과 물과 연기와 통곡이 뒤엉킨 참화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분투한 시간이었고, 그래서 뿌듯합니다.”

◇무안, 가장 참혹했던 현장

-이제 비상 출동벨로부터 자유로워졌겠다.

“몸은 편해졌다. 한겨울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고, 폭우를 뚫고 달리지 않아도 되고.”

-퇴임식은 잘 하셨나.

“그냥 약소하게. 소명을 다하고 무사히 돌아와줘서 고맙다는 아내의 칭찬으로 충분히 행복했다(웃음).”

-퇴임 무렵이 무안공항 참사 1주기였다.

“유족분들이 평온한 일상을 되찾으셨길 바랄 뿐이다.”

-37년 소방관 인생에 가장 참혹한 현장이었다고 했더라.

“일요일 공구시 삼분(9시 3분)경에 연락을 받았다. 공항이라 큰 사고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현장을 보니 훨씬 참담하더라. 충돌과 폭발, 붕괴와 압사가 동시에 일어난 데다 기체에서 쏟아져 나온 기름과 물로 활주로는 거의 뻘밭이 돼 있었다.”

-사고 현장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수색했다던데.

“귀국길 가족을 맞이하려던 기쁨이 최악의 고통으로 바뀐 유족들에게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빠른 수습뿐이었다. 현장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역을 나눴고, 대원들 장화에 유골이 밟히지 않도록 이동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희생자가 발견된 위치에 깃발을 꽂으며 수색 지도를 그려나갔다. 12시간 만에 1차 수습을 마칠 수 있었다.”

-신원 확인 후에도 20일 넘게 현장을 수색했더라.

“기체 폭발로 시신이 수백미터 밖으로 흩어져 있었다. 유골 한점, 유품 하나라도 온전히 유가족께 돌려드리기 위해 낫으로 풀을 베고 눈을 녹여가며 호미로 진흙밭을 훑었다. 새와 들짐승을 쫓기 위해 밤에도 조명을 켰다.”

-수색 완료 후 대원들과 함께 분향소를 찾은 모습이 보도됐다. 많이 울더라.

“아이들이 웃고 있는 영정을 보니 가슴이 아파서. 세월호 때도 그랬고 무안도 그렇고, 아이들을 거둘 때가 가장 힘들다. 이런 비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2024년 12월 29일 무안 공항에 동체 착륙을 시도하다 둔덕에 부딪혀 폭발한 제주항공 여객기 모습. /뉴스1

◇人命 구조에 영호남 따로 없어

-대형 재난으로는 무안이 마지막 현장이었나?

“지난해 3월 의성에서 시작해 안동, 청송, 영양, 영덕으로 확산된 경북 산불 현장에도 갔다.”

-소방관을 비롯해 인명 피해가 큰 재해였는데.

“영덕에 새벽 2시쯤 도착했는데,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낙엽이 1m씩 쌓여 형성된 퇴적토가 불덩이가 되어 강풍을 타고 날아다녔다.”

-102세 노인의 유골을 찾느라 10시간을 사투했다고.

“포항서 달려온 자식들이 어머니 유골 한 점만이라도 찾아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전소돼 형체를 알 수 없게 내려앉은 집터를 호미와 갈퀴로 긁어가며 유골 몇점과 치아에 끼고 계셨던 4마디 보철을 찾아드렸다.”

-영덕은 전남 119 구조대와 대구 119 구조대가 협업했다고 들었다.

“무안 참사도 그랬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동서(東西)가 따로 없다. 닷새동안 소방차에서 함께 먹고 자며 화마와 싸운 시간들이다.”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도 갔더라.

“소방관이 되고 처음 경험해본 대형 재난 현장이다. 주(主)기둥만 남고 건물이 폭삭 주저앉은 모습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전남 구조대가 서울까지 올라간 건가?

“삼풍 사고는 국가동원령이 내려진 최초의 재난이다. 서울, 경기 구조대만으로는 대응이 어려워 전국 소방서에 동원령이 내려졌다.”

-2차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90년대만 해도 소방관의 안전보다는 매립자 구조가 우선이었다. 요즘처럼 자원봉사단체들도 없어서 12시간 작업 후 교대하면 주먹밥 한덩이 먹고 공터에 비닐을 깔고 눈을 붙였다. 한여름인데 샤워할 곳이 없어 속옷을 찬물에 적셔 입고 다시 일했다. 보름을 그렇게 견뎠다.”

-서울로 출동하던 날이 어머니 수술 날짜였다더라.

“소방대원으로 산다는 건 가족의 이해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밥 먹다가도 뛰어나가고, 자다가도 달려나가고. 그래도 생존자를 구해내면 만세 부르며 기뻐하는 이들이 소방관이다(웃음).”

조양현 전남소방본부 119 특수대응단 구조대장이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 그는 "주황색 제복의 책임감과 무게감을 크게 느꼈다"고 했다. /조양현 대장 제공

◇홍제동 방화사건의 교훈

-진도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도 구조 활동을 했다.

“그땐 매일 울면서 일했다. 내 자식들 또래였다. 들것에 실린 아이의 차가운 살결이 내 몸에 닿았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재난 현장으로 달려갈 때마다 반복되는 안전 불감증에 분노할 것 같다.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우선하는 풍토, 무수한 위험 징후와 경고에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당국, 국민들의 안전소방 의식 부재가 언제나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2001년 6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은 홍제동 방화 사건 이후에도 골목에 불법 주차한 차들이 얼마나 많은가. 위험 지구엔 지자체가 주차타워를 만들어줘야 하고, 국민들도 비좁은 골목엔 주정차를 해선 안 된다는 선진의식을 가져야 한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의 원인을 두고도 논란이 많다.

“정확한 사실 관계는 전문가들이 밝혀내겠지만, 둔덕이 굉장히 높았던 기억은 난다. 비행 유도 장치라고는 하지만 기체가 충돌해 폭발한 원인이 둔덕이었기 때문에 너무 안타깝다.”

-정부의 위기 대응 체계는 어떤가.

“육·해상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위기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은 육상 재난은 소방청이, 해상은 해경이 지휘하는데, 재난은 대부분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 각자의 지휘 체계를 고집하다 보면 대응 능력이 떨어진다. 신종 사고, 예측 불허의 재난이 증가하고 있는 만큼 통합된 지휘 체계 아래 유형별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대처했으면 좋겠다.”

37년 소방관의 삶을 마무리한 조양현 대장은 "앞으로는 계획없이, 자유롭게 살 것"이라며 웃었다. /김영근 기자

◇주황색 제복의 무게감

-왜 소방관이 됐나?

“대학을 1년 다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도 복학할 돈이 없어 공시생이 됐는데 우연히 소방공무원 채용 공고를 봤다.”

-처음 출동한 현장을 기억하나?

“첫 발령지인 여수 사거리에서 큰 교통사고가 났다. 절단된 신체를 그때 처음 봤다. 충격과 두려움에 떨던 신입 소방관을 지켜준 것이 제복이다. 주황색 제복이 주는 책임감, 무게감이 나를 일하게 했다.”

-2007년 여수출입국 관리사무소 화재 진압으로 ‘소방 영웅상’을 받았다.

“화재 발생 후 최초로 건물에 진입해 43명을 구조했다. 그중 열 분은 유독가스 질식으로 돌아가셨다. 불법 체류자로 감금돼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숨은 의인 선행상’도 받았더라.

“어릴 때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서 할머니가 손자들 밥을 해주셨다. 소방관 되고 얼마 안 돼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인복지시설의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할머니가 그리워져 조금씩 후원했을 뿐이다.“

-소방관은 박봉의 상징인데.

“첫월급이 17만9000원이었다(웃음). 홍제동 방화 사건이 일어난 2001년 당시만 해도 방화복이 없어 불에 타는 방수복을 입고 화재 현장에 들어갔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겠다.

“불이 난 상가 건물 3층에 고립돼 있던 10대 아이들을 구하러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진입할 때 박살난 유리창에 왼손을 다쳐 10여 바늘 꼬맸다. 영광의 상처다(웃음). 태풍으로 방파제에 고립된 할아버지를 구하러 가다 파도에 휩쓸린 적도 있다. 다행히 잠영을 통해 살아나왔다. 파도가 칠 땐 바다 표면에서 헤엄치려 하면 더 위험하다.”

-출동벨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가.

“전혀! 누가 강제로 시킨 일 아니고 내가 선택한 소명인데 기꺼이 달려나가야 하지 않겠나(웃음).”

-사고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방관도 많다던데.

“현장에선 냉철한 책임감으로 버티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나 같은 고참도 심신이 무너진다. 무안의 경우 서너 달 불면에 시달렸다. 3일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대원도 있다.”

-치료를 따로 받나?

“소방본부에서 심리 상담을 해준다. 문제는 퇴직 이후다. 공무원 신분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지원이 끊긴다. 직장 다닐 땐 동료들과 어울리며 의지하고 위로받을 수 있지만 퇴직 후엔 홀로 싸워야 한다.”

-목숨을 걸고도 빛이 안 나는 일을 왜 37년이나 했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아무나 타인의 생명을 구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자부심에. ‘고맙다’ ‘수고하셨다’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인사 한마디면 다시 힘을 얻었다.”

-동안(童顔)이시다.

“구조대 생활을 오래해서(웃음). 타인을 구하려면 내 몸이 강하고 날렵해야 한다.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국민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술, 담배 대신 마라톤과 수영을 했다.”

-이제 뭘 하실 건가.

“계획없이, 자유롭게 살 것이다. 공무원 삶과는 정반대로!(웃음)”

☞조양현

1965년 광주광역시 출생. 1988년 소방공무원이 됐다. 여수, 여천, 광양, 보성소방서를 거쳐 전남소방본부에서 일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경북 산불 등 대형 재난 현장에서 특수구조 활동을 했다. 2023년부터 전남119특수대응단 특수구조대장으로 일하다 지난 12월 정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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