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희은의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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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 가수
가끔 요양보호사, 방문간호사, 사회복지사 분들 사연을 보면 그분들은 남다른 성정의 주인공들 같다. 1월 말쯤 도착한 어느 방문간호사의 편지부터 소개하겠다. 어른을 지나치려다 복지사의 얘기에 멈춰 섰단다. 늘 품 안에 넣고 다니던 편지 한통. “내가 혹시 길에서 버스에 치여 죽더라도 절대 운전사 탓하지 말라”는 내용인데 그건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신호였단다. 자식들 채무로 신용이 무너지고 해결의 기미는 없고 생계 때문에 위험한 일을 놓지 못하고, 건강은 위중하고 지속적 치료가 필요한데 신용불량자라 카드 발급도 안 되는 입장. 복지 혜택 드리고 싶어도 행정 기준 경계에 걸려 막히는 부분도 많았단다. 가정방문 가겠다고 하자 “뭐 해줄 게 있다고 그러냐” 화부터 내셨는데, 가장 절실한 걸 여쭈니 “장애인 택시”라 해서 직접 인터넷 검색 뒤 서류 신청하고 이용하시게끔 하고 나니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더란다. 복지 담당자와 힘을 모아 식사 지원, 치료비, 경제적 도움이 가능하게끔 했더니 “관심 가져준 덕에 살 수 있었다”며 손을 꼭 잡아주신 어르신,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 곁을 지키는 할아버지 품에 오래 안겨 남긴 마지막 말은 “아! 따뜻하다”였다는데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겠더란다.
또 곰팡이 가득한 반지하 방에서 영구임대주택으로 이사 오신 90살 어르신이 “궁궐이 따로 없다”며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보기 좋았단다. 그러나 집 바뀌었다고 건강까지 좋아지진 않는 법. 어지럼증 심하고 스스로 상태 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복지 담당자와 소통해서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장기요양등급신청에 생계급여까지 제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길을 하나둘 열어드리니 일상이 안정되며 표정도 아주 편해지셨단다.
“누구도 관심 안 두는데 여기저기 말해준 덕에 내가 살았어요. 죽어서 천당 가도 못 잊을 거야. 진짜 고마워요.”
두 어르신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건 큰 기적이 아니라 첫 단추를 함께 끼워주는 일, 정보도 없고 힘에 부쳐 마음이 닫힌 분들께 함께하자고 말하는 일, 전화 한통, 절차 동행 한번이 어떤 이에게는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된단다. 혈당·혈압 체크하고 약 복용 여부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분들의 생을 다시 오늘로 이어붙이는 일이 나의 일이며 가장 절박한 순간에 손을 내미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끝을 맺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두번째 편지는 마흔을 앞둔 보통 사람의 이야기. 어느 날 출근 뒤 앉았는데 손의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큰 숨을 쉬어도 폐까지 안 들어오기에 거울을 보니 이미 자기 얼굴이 아니었고 급기야 그날 오후엔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단다. 의사는 “지금 상태로 계속 일 못 한다. 번아웃에 가까운 우울 증상이다” 해서 회사에 휴직을 알리고 물건을 정리해 집으로 왔단다. 처음 며칠은 아무것도 안 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며칠 뒤 서랍 정리 중에 몇년 전 스스로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다며 큰맘 먹고 산 시계가 멈춰 있는 게 나와 너무 닮았다고 느꼈단다. 하지만 멈췄다고 고장 난 건 아니라는 깨달음. 하루에 딱 하나만 하고 살자. ‘이불 개기. 밥 한끼 챙겨 먹기. 동네 한바퀴 걷기.’ 대단한 목표도 아니고 잘 살겠다는 다짐도 아니고 오늘 하루 버티는 걸 목표로 삼았단다. 어떤 날은 그 하나조차 해내지 못해도 스스로 혼내지 않고, “오늘은 여기까지” 했단다. 며칠에서 몇주가 지나 조금씩 변화가 생겼고 아침 햇살이 덜 부담스럽고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단다. 어느 날 공원 벤치에서 구름을 보니 아! 나도 이렇게 가도 된다는 위로가 되더란다. 손목시계 배터리를 갈면서 “괜찮아, 지금도 잘 가고 있고 멈춰 있던 시간이 실패는 아니야.” 오래 무시해 온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었단다. 느려도 좋아. 오늘 아무것도 못 했어도 괜찮다.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거친 세상 속도전에 내몰린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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