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금곡, 엄흥도의 흔적이 남은 철의 요새
영월 엄씨 가문 울주에 온 이유
천하 요새에 숨겨진 충절의 비사

설날이 코앞이다. 지난주말 칼바람이 몰아쳤다. 입춘지난 춘기에 서슬퍼런 북풍이 웬일인가 싶었지만 그 바람을 뚫고 삼동을 향했다. 지난 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때문이다. 단종의 비극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영월 호장(戶長-향리직의 우두머리) 엄흥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콘텐츠는 신선했다. 엄흥도와 울주 삼동은 인연이 깊다. 삼동은 울주의 서남단이다. 동으로 청량과 범서, 서쪽으로는 양산 하북과 맞닿아 있다. 주변의 산세는 예사롭지 않다. 정족과 남암, 문수가 쟁쟁하게 어깨를 겨누고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태화강 상류로 이어진다. 이 땅은 2,0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철의 기억을 간직한 자리다. 바로 이 땅에 비운의 왕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을 품은 엄흥도의 족적이 남아 있다.
울주 금곡(金谷)은 예로부터 '쇠골'이라 불렸다.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새각단'이라는 이름에 닿는다. 새각단은 '쇠각단'이 변한 말이다. '각단'은 마을을 의미하는 옛말로 직역하면 '쇠마을'인 셈이다. 조선시대 이곳은 장인들이 철을 채굴하여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이를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실제로 2003년 진행된 지표 조사에서는 제련로의 직접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철을 뽑아낼 때 생기는 찌꺼기인 슬래그(slag)가 광범위하게 발견됐다. 유추하면 금곡은 조선 시대 울산지역의 중요한 쇠부리터(철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금곡이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다양한 시대별 자기 파편들과 슬래그는 과거 이곳이 뿜어냈을 뜨거운 철의 열기를 짐작게 한다.
금곡은 동서남북이 재석당골, 중금곡 등 산지로 둘러싸여 있지만 마을 남북으로는 길게 농경지가 펼쳐진 요새같은 마을이다. 무엇보다 빼어난 산세에서 쉼없이 쏫아나는 물길이 터골못, 은어골못 등 풍부한 저수지을 만들어 농사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그 산세와 풍광이 여러 부락을 만들어 둔기부터 왕방, 금곡에 보삼까지 깊은 골짜기와 풍광좋은 삶의 터를 닦아 수천년 전부터 인심좋고 물산좋은 마을로 알려졌다.
금곡마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다. 엄홍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1457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죽임을 당했을 때 수양은 "노산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리라"는 어명을 동봉했다. 모른척 안본척 하는 게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기에 동강 위를 떠 있던 단종의 시신은 구천을 떠돌았다.
그때 분연히 일어선 자가 엄흥도였다. 영월 관아에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아들 셋과 함께 밤을 도와 단종의 시신을 거뒀다. 후대 기록에 당시 엄흥도는 모두가 두려워한 단종의 장례를 자청하면서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선을 행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달게 여긴다)이라는 문장을 남겼다고 전한다. 단종의 묘역인 장릉의 이야기도 신비롭다. 쫓기듯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탓에 마땅한 묘터를 찾지 못했을 때 홀연히 노루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던 자리를 박차고 달아났다. 초겨울 언땅에 삽질이 어려웠지만 노루가 떠난 자리는 움푹하게 파여 매장이 쉬웠다. 세월이 지나 단종이 복위된 뒤 일설에는 복권된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왕실에서 지관을 파견했지만 묘자리가 천하명당이라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
단종의 묘를 추스린 엄흥도는 어찌됐을까. 거사를 마친 엄흥도는 가족과 함께 영월을 떠나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단종의 어의를 챙겨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숨어들어 유생들과 제를 지낸 뒤, 다시 문경에 잠시 머물다 경주를 거쳐 정착한 곳이 울주 언양현 왕방리 금곡이다. 일설에는 문경에서 노후를 보냈다고 하기도 하고 경북 군위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이다. 다만 아들 셋을 영월에서 데리고 야반도주 하면서 가문을 대를 잇기위해 문경과 군위에 아들을 각각 거처하게 하고 울주 금곡에 숨어 살았다는 기록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지금 울산에 남아 있는 엄흥도의 후손은 삼동과 언양, 온산 일대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 증좌다.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울산에 남아 있다. 바로 원강서원(圓岡書院)이다. 이 서원은 1799년(정조 23년) 온산 대정에 '원강사(圓岡祠)'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지만 1817년 유림의 논의를 거쳐 서원으로 승격됐다. 이후 서원 철폐령과 공단 편입 등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겪으며 1995년 지금의 삼동면 둔기리로 자리를 옮겼다. 원강서원에는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인 '원강서원 비'가 있다. 1820년 강화도에서 가져온 오석으로 제작된 이 비석은 뱃길을 통해 온산까지 운반된 진귀한 유산이다. 비석 맨 위에는 '조선 충신'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이조판서 이조원이 쓴 것으로, 미술사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단종 사후 200년이 지나 숙종 때 대왕으로 단종이 복권되면서 엄흥도도 신원이 회복됐다. 고종은 신원회복은 물론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판서 관직까지 추증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끊지 말라)'의 명도 내렸다. 임금이 직접 축문을 쓰고 제사 물목까지 챙길 정도로 그의 충절은 조선조 충절의 상징이었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cedar093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