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는 입구일 뿐, ‘A여고 사서…’[공소남 시즌2]

양형모 기자 2026. 2. 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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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들의 성장담을 미스터리의 외피를 빌려 그린 뮤지컬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의 한 장면. 사진제공 | 홍컴퍼니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출발하지만, 공연이 끝났을 때 관객이 붙잡고 나오는 것은 어쩐 일인지 성장의 기억이다.  창작뮤지컬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은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처럼 출발해, 미래를 두려워하던 사춘기 소녀들이 서로를 통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작품의 출발점은 1993년 겨울, A여고 반지하 도서관이다. 비 오는 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간 낯선 남자의 발목, 다음 날 자취를 감춘 문학 교사, 도서부장 명경이 반복해서 꾸는 불길한 예지몽이 관객을 끌어들인다. 초반부는 미스터리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무게중심은 사건의 정체가 아니라, 그 사건 앞에서 각자가 외면해온 선택으로 이동한다.

무대는 절제된 장치로 공간과 시간을 표현한다. 좌우로 이동하는 출입문 하나가 장면 전환의 핵심이고, 후면 조명 변화만으로도 장소의 차이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창문에 비치는 다리의 이미지는 반복되며 불안과 예감을 환기시키는 시각적 신호로 기능한다. 설명 없이도 관객이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연출이다.

반지하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명경의 내면과 정확히 겹쳐진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책 속에 머무는 명경은 스스로를 지키는 동시에 고립을 선택한 인물이다. 미래를 미리 본다는 능력은 자유가 아니라 족쇄다. 무엇이 올지 알기에 그는 어떤 결정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런 명경에게 꾸준히 말을 걸며 벽을 두드리는 존재가 지수다. 지수는 명경을 도서관 밖으로 끌어내려는 인물이며, 환희와 수영을 도서부로 불러모은 인물이다.

네 명의 여고생은 친밀함과 질투, 오해를 오가며 관계를 쌓아간다. 환희와 수영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장면에서 극에 숨을 돌릴 여지를 만들어준다. 그러다 문학 교사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맞닥뜨리며, 이들은 각자의 두려움을 공유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1990년대라는 시대 배경도 작품의 인상을 짙게 만든다. 금서의 존재는 통제와 억압의 공기를 자연스럽게 불러오고, 여고라는 폐쇄적 환경과 반지하 도서관의 설정은 서로 맞물려 긴장감을 키운다. 바다와 여행, 모험에 대한 동경, 수상한 정장 구두의 남자 같은 요소들 역시 흩어지지 않고 소녀들의 성장을 향해 정렬해 있다.

문학 선생님의 행방을 찾아 무작정 바다로 떠난 여고생들
넘버는 상황 설명에 머무르지 않고, 인물의 속내를 바로 꺼내 보여준다. 성인이 된 명경이 폐쇄를 앞둔 학교 도서관을 다시 찾으며 시작되는 구조는 기억을 더듬는 방식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명경의 ‘복도에서’는 불안과 고립을 담담히 펼치고, ‘수상한 발목’과 ‘말도 안 돼’는 관객을 사건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지수의 ‘바꿀 수 있는 미래’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정서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는 곡이며, 수영의 ‘엑스트라’는 밝은 얼굴 뒤에 숨은 고민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첫날 공연부터 배우들의 합은 안정적이었다. 명경 역의 정우연은 차분한 음색으로 인물의 불안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고, 지수 역의 전혜주는 따뜻한 에너지로 그 벽을 깨물듯 허물어갔다. 정다예가 연기한 수영은 또렷한 발성과 음색으로 무대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백예은의 환희는 솔직한 감정 표현으로 극에 생기를 더한다. 첫 무대 특유의 긴장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단단한 팀워크와 연습량 덕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는 ‘18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선정작이다. 신작 개발 과정에서 다듬어진 완성도가 무대 위 결과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은 4월 26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2관에서 공연된다.

예지몽이 가리킨 불길한 미래 앞에서 이들이 내린 답은 거대한 결단이 아니었다. 서로를 향해 내딛는 작은 걸음. 자극적인 장치보다 일상의 변화에 주목한 선택이 이 작품을 오래 머물게 만든다. 슴슴하지만 속이 꽉 찬 밥상 같은 작품이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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