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제전"은 구호뿐?… 유엔 '올림픽 휴전' 결의안, 성적표는 17대 0
기원전 776년 올림피아 제전 '휴전'에 뿌리
1994년부터 매번 '올림픽 휴전' 결의했지만
공염불 그쳐… '러, 우크라 침공'이 대표 사례
"올림픽 때도 포기하면, '폭력의 언어'만 남아"

"전 세계적으로, 갈등과 분열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특히 올림픽은 사람들이 적이 아닌 동료 인간으로 만나는 희소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올림픽 휴전'의 정신은 분열을 잠시 접어 두고 우리를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해 보자는 호소입니다."
지난해 11월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막을 두 달여 앞둔 이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역사상 최초의 여성·아프리카 출신 위원장인 커스티 코번트리 위원장의 연설 중 한 대목이다. '올림픽 휴전' 제안이었다. 코번트리 위원장은 '평화'라는 올림픽 정신을 강조하며 "분열이 만연한 이 암울한 시대에도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엔의 165개 회원국이 공동 발의에 참여했고, '올림픽 개막 1주일 전~패럴림픽 폐막 1주일 후'를 휴전 기간으로 정한 '올림픽 휴전 결의안'은 이날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하지만 휴전은 실현되지 않았다. 4년 전 베이징 동계올림픽 휴전 기간(2022년 1월 28일~같은 해 3월 20일) 중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러시아는 '2026 올림픽 휴전' 개시일인 지난달 30일에도 우크라이나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올림픽 기간에는 모든 전쟁을 멈춘다"는 고대 올림픽의 전통은 이번에도 지켜지지 않을 공산이 커졌다.

고대 올림픽, 시작부터 '휴전'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에케케이리아'(Ekecheiria·'손을 잡다'는 뜻)라고 불리는 올림픽 휴전의 전통은 올림픽의 탄생,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원전 8세기 무렵,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과 전염병으로 매우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 이전 평화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도시국가 '엘리스'의 왕 이피토스는 델포이 신탁에 방법을 물었고, '4년마다 올림피아 제전을 열라'는 계시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스 일대에는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 앞에서 인간의 건강한 신체를 뽐내는 전통'(제전)이 있었는데, 잦은 분쟁으로 바로 이 제전이 제대로 열리지 못한 결과 '전쟁의 시대'가 본격화했다고 여긴 것이다.
전쟁이 일상이던 고대 그리스에서 '신체 건강한 젊은이'를 제전에 참가시키려면 휴전은 필수적이었다. 결국 이피토스는 스파르타, 피사의 정치 지도자들과 첫 휴전 협정을 맺었다. 올림피아 일대에는 군대 진입을 금지하고, 참가자와 관중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고대 그리스 최초의 올림픽은 휴전 협정의 보호를 받은 올림피아에서 기원전 776년 개최됐다. 올림피아 제전 시 휴전은 '신의 명령'으로 여겨졌고, 그리스 시대 이후 로마 시대까지 계속된 올림픽이 기원후 393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칙령으로 폐지될 때까지 1,000년 이상 대체로 지켜졌다고 한다. 예컨대 27년간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도 올림픽 기간에는 중단됐다.

한 번도 안 지켜진 '올림픽 평화' 약속
"전쟁은 서로를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인종 간 분열을 야기하는 편견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 이를 위해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아 근력과 민첩성 겨루기 친선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 1896년 미국 월간지 '센추리 일러스트레이티드' 기고문 중
'스포츠로 평화를 도모한다'는 아이디어는 프랑스 귀족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1894년 IOC를 구성하고, 2년 뒤인 1896년 첫 근대 올림픽 대회를 그리스에서 개최하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을 연다고 평화가 담보되는 건 아니었다. 1916 베를린올림픽은 1차 세계대전으로 백지화됐고, 1944 런던올림픽도 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됐다. 1980 모스크바올림픽 땐 1979년 12월 소련(현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미국 등 62개국이 불참했으며, 이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소련 등 14개국은 19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올림픽 휴전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제안이 나온 건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이후였다. IOC는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기간 중 휴전을 건의했고, 유엔은 총회를 열어 휴전 결의문을 채택했다. 2,770년 전 고대 그리스 '올림픽 휴전 협정'의 부활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올림픽 휴전 선언'은 1994년 그때부터 현재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이르기까지, 총 17번의 동·하계 올림픽을 치르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7대 0 패배'라는 초라한 성적표다. 크고 작은 분쟁은 올림픽 휴전 기간에도 지속됐고, 침략국은 "국내 정치적 문제"라는 한마디로 휴전 결의 위반을 정당화했다. 올림픽 휴전 결의는 '공염불'에 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틴, 2008년 개막식서 '조지아 침공' 통보
올림픽 휴전을 대놓고 무시한 최근 사례는 역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러시아는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2022년 2월 4~20일)을 앞두고 채택된 유엔 휴전 결의문의 공동발의 국가 중 하나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 개막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올림픽 폐막' 직후이자 '패럴림픽 개막'(2022년 3월 4일) 직전이었던 그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개시했다. 이 전쟁은 이번 밀라노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역시 올림픽을 기만전술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군사 작전이 올림픽 개막식 도중 이뤄졌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8일 100개국 정상급 인사가 참석한 2008 베이징 하계올림픽 개막식이 끝날 무렵, 러시아의 '실권자 총리'였던 푸틴 대통령은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개전 사실을 알렸다. 미국과 유럽의 도움을 바랐던 조지아는 허를 찌르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닷새 만에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도 '올림픽 휴전을 위반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1998년 2월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미국이 곧 이라크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 미국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보유를 문제 삼고 있었던 탓이다. 마이크 맥커리 당시 미 백악관 대변인은 '올림픽 휴전 정신을 지켜 달라'는 IOC와 개최국 일본 등의 호소를 "스포츠 경기가 정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없다"며 일축했다. 올림픽 휴전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걸프 지역에 항공모함과 폭격기 등 군사력을 증가하며 일촉즉발 상황도 초래됐다. 다만 이라크가 유엔의 무기 사찰을 전격 수용함에 따라 이땐 미국의 공격이 현실화하지 않았다.
4년 후 미국은 자국에서 열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시기엔 아예 IOC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휴전' 요구를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1년 전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9·11 테러의 여파였다. 결국 당시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부시 미 대통령과 면담한 뒤 "선수들의 안전한 참가와 참가국들의 평화적 경쟁을 보장한다"는 소극적 내용의 결의안을 유엔에 냈다. 채택된 결의문에는 아프간 전쟁 휴전 호소 대신, '9·11 테러 규탄'이 담겼다.

'17전 17패' 전적에도 휴전 호소는 계속
"우리가 16일 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국제올림픽휴전센터 슬로건
'구호'에 그쳐 버린 올림픽 휴전이라 해도,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잠깐만이라도 싸움을 멈추자'는 전 세계의 호소가 최소한 물리적 충돌을 머뭇거리게 만들거나 인간의 호전성을 성찰해 보는 계기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AP통신에 따르면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기간, 보스니아 내전은 하루 동안 중단됐다. 딱 1일뿐이었으나, '사라예보 포위망'이 풀린 사이 구호물자 수송대가 진입해 전쟁에 시달리고 있던 민간인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국제올림픽휴전센터의 콘스탄티노스 필리스 소장은 AP 인터뷰에서 "달성 가능하진 않을 수도 있지만, 올림픽 휴전의 메시지는 지구 곳곳에 전달된다"며 "가능한 한 어디에서든 평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라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쟁을 조금이나마 주저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매번 올림픽 휴전 선언을 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올림픽은 끈질기게 '평화'라는 화두를 던진다. 남북한 선수단의 2000 시드니올림픽 개막식 공동 입장은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파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선의의 대결을 펼친 러시아·우크라이나 선수들의 우정도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던 양국 간 긴장감을 무색하게 했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2009~2011년 재임)는 지난 2일 유로뉴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누구도 스포츠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의 평화 문화를 구축하려는 이러한 노력마저 없다면, 폭력은 결국 국제 관계의 기본 언어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구속력이 없고, 실제로도 '17전 17패'라는 처참한 성적이지만, 그럼에도 올림픽 휴전 결의를 중단해선 안 되는 이유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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