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생각은] ‘킹받네’ 들어간 고전 오디세이아… AI 도서 품질 논란

이호준 기자 2026. 2. 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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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9000권 찍어내는 AI 출판사 등장
“비용 절감” vs “저질 콘텐츠가 잠식”
AI가 번역하고 작성한 도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립소는 이 말을 듣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킹받네!’”

국내 한 출판사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번역한 고대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 책의 한 대목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고난을 그린 작품에 킹받네(매우 화가 난다)는 물론 ‘알빠노(내가 알 바 아니다)’ ‘어쩔티비(어쩌라고)’ 같은 인터넷 신조어가 등장하자 고전의 품격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AI 출판이 확산하면서 품질을 둘러싼 논쟁도 커지고 있다. 독자들은 “검증 안 된 저품질 AI 도서가 시장을 잠식한다”며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출판업계는 “비용 절감 등 효율성 측면에서 불가피한 흐름이며,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편집·감수의 문제”라고 맞서고 있다.

국내 한 출판사가 낸 오디세이아 번역본 발췌. /이호준 기자

◇AI 출판 급증에 품질 논란… 납본 제도 논란도

4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AI를 활용해 ‘양산형’ 도서를 찍어내는 출판사가 급증하고 있다. 출판사 루미너리북스는 AI를 활용해 연간 9000권에 달하는 전자책을 쏟아냈다. 출간 도서는 ‘주식 투자를 위한 교양 캔들차트 기초’와 같은 경제서부터 ‘청소년을 위한 교양 생명과학’ ‘니콜로 마키아벨리 아포리즘’ 등 사회·과학서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저자는 ‘루미너리북스 교육출판 에디팅 팀’ ‘루미너리북스 금융출판 에디팅 팀’ 등으로 표기됐다. 상품 정보란에는 AI 활용 제작 도서라는 점이 함께 명시돼 있다.

루미너리북스뿐만 아니라 AI 활용을 명시한 출판사만 7곳이다. 업계에선 AI를 보조 용도로 쓰거나, 사용하면서도 밝히지 않는 출판사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본다.

AI 출판을 둘러싼 상반된 입장. /챗GPT 제작

문제는 AI 도서의 품질이 독자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점이다. 가장 논란이 된 오디세이아 번역본에는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 ‘머선129(무슨 일이고)’ 같은 신조어가 수두룩하다. 서문부터 “이 번역본의 새 판과 동시에 출판하는 새 판 서문에서 저는 두 책의 탄생 배경에 대해 일부 설명했다”와 같이 주술 호응이 맞지 않는 비문도 나온다.

양산형 AI 출판 행태가 ‘납본 제도’를 악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은 관련 법에 따라 국내에서 발행된 책을 의무적으로 수집하는데, 이 과정에서 출판사에 책 한 권의 정가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지난해 루미너리북스가 납본을 신청한 전자책 395건에 대해 납본 제외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도마 위에 오른 출판사들은 억울하다고 했다. 오디세이아 번역본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는 품질 논란과 관련해 “번역 과정에서 AI를 활용했을 뿐, 인간의 검수를 거쳐 출판했다”며 “신조어는 세대 간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넣은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또 “해당 도서는 AI 구버전을 사용해 품질에 한계가 있었지만, 최신 버전을 활용한 도서는 인간 번역서와 품질 차이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루미너리북스도 지난 2일 입장문을 통해 “납본을 통해 1원의 보상금도 받은 적이 없다”며 “납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 발생할 불이익을 우려해 일부 도서에만 납본을 신청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9월 이후에는 납본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전경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출판계 고사 위기 속 “고육지책”… 가이드라인 필요

출판 시장이 쪼그라드는 상황에서 AI 활용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을 통해 감사보고서를 공시하는 출판사 71곳의 연간 매출은 2024년 기준 총 4조8911억원이다. 5년 전 5조3836억원보다 5000억원 가까이 줄었다. 영세 출판사의 상황은 더 좋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을 사람에게 맡기면 한 권당 최소 200만~300만원의 비용이 든다. 반면 AI를 활용하면 연간 수만원에 구독료만으로도 충분하다.

AI가 수익을 다각화하는 창구로도 쓰인다. 한국은 관련 법에 따라 저작자 사망 후 70년이 지나면 저작권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어, 오래전 사망한 작가의 고전 문학이 AI 번역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이 된 오디세이아를 출간한 해당 출판사 역시 기존에는 학술용 도서를 중심으로 출판해 온 곳이다.

최근 신작을 낸 황석영 작가도 챗GPT를 활용했다고 밝힐 만큼 AI 출판이 이미 시장 전반에 자리 잡은 상황에서 품질 관리가 중요해질 전망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호불호와 관계없이 극작이나 소설 등에서도 AI를 활용한 작품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콘텐츠 생산자가 AI를 얼마나 활용했는지 밝히는 규범을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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