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비튼 무대, 무대 역사 뒤집다

유주현 2026. 2. 7.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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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뮤지컬 뉴 트렌드 ‘역사 판타지’
문화체육관광부의 K뮤지컬 지원 예산이 지난해 31억원에서 올해 244억원 규모로 껑충 뛰었다. 지난해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석권 이후 뮤지컬이 K트렌드 차기주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중 160억원이 대형 뮤지컬 제작에 집중되는데, 해외 메이저 시장에서 승부하려면 화려한 미장센을 갖춘 대극장 콘텐트가 경쟁력이 있어서다. 현장에서도 완성도 높은 대극장 창작물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EMK뮤지컬컴퍼니의 신작 ‘한복 입은 남자’는 지난달 19일 열린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과 편곡·음악감동상, 무대예술상 3관왕을 석권했다. 지난달 27일엔 에이콤이 또 하나의 대작 ‘몽유도원’을 내놨다. ‘명성황후’ ‘영웅’을 만든 뮤지컬계 대부 윤호진 연출의 30년 숙원 사업이다. 새해 벽두부터 대극장을 장식하고 있는 신작들은 둘 다 우리 역사를 콘텐트로 삼았지만, 기존 ‘국민 뮤지컬’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엄숙주의를 덜어낸 본격 판타지와 미학적 고도화로 세계를 겨냥하고 있다.

도미부인 설화를 모티브 삼은 ‘몽유도원’. [사진 각 제작사]
“나는 이와 같이 피처럼 절실하고 죽음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몽유도원’의 원작 소설 『몽유도원도』(1995)를 쓴 최인호 작가가 삼국사기의 민중설화 도미 이야기에 꽂힌 이유다. ‘춘향전’으로 이어진 삼각 러브스토리의 원형으로 실제 역사가 모티브다. 1400여년 전 백제. 고구려의 위협 등 혼란기에 즉위한 개로왕은 선왕의 암살로 인한 트라우마와 귀족세력의 압박에 시달리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에게 집착하게 된다.

1996년부터 이 소설의 무대화를 꿈꿨던 윤호진 연출은 2002년 ‘몽유도원도’ 초연 이후 24년 절치부심 끝에 ‘몽유도원’을 내놨다. 안재승 작가가 각색을 맡아 폭력적 권력의 화신 개로왕(민우혁·김주택)에게 지독한 짝사랑의 슬픔을 덧입혔고, 도미(이충주·김성식)와 아랑(하윤주·유리아) 부부에게 역모의 누명을 쓴 부족 목지국의 지도자라는 설정을 더해 고뇌를 부각시켰다. 현실에 없는 눈먼 사랑의 전설이 ‘동양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만하다.

‘몽유도원’의 아랑 역 하윤주. [사진 각 제작사]
2002년엔 이런 무대를 시장이 감당 못했다. 검증된 라이선스 대작에 비해 토종 창작이 대극장을 채우려면 역사물에 엄숙주의와 영웅주의가 공식이었다.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웅장한 코러스로 객석을 전율시켰던 ‘명성황후’(1995), “누가 죄인인가”라는 안중근의 절규가 사무쳤던 ‘영웅’(2009)이 대표적이다. 신시컴퍼니가 조정래 소설을 무대화한 ‘아리랑’(2015)이나 광주시가 5·18을 소재삼은 ‘광주’(2020)는 영웅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위로하는 제의적 시도였지만 역사의 비극으로 심금을 울리는 건 변함없었다.
일 테노레. [사진 각 제작사]
그런데 점차 대극장 역사물도 무게를 덜어내고 ‘팩션’으로 엔터테인먼트적 재미를 강화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테너 이인선을 모티브 삼은 오디컴퍼니의 ‘일 테노레’(2023)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배경에도 항일 투쟁 자체보다 난폭한 세상에서 오페라를 꿈꾸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거듭된 반전으로 흥미진진 펼쳐냈다. 오는 4월 재연 예정인 ‘스윙 데이즈_암호명 A’(2024)도 유일한 박사의 은밀한 독립운동을 다루지만, 위대한 민족 영웅이 아니라 턱시도를 입고 스윙재즈에 맞춰 춤추는 매력적인 ‘모던 보이’ 스파이물로 풀어냈다.
스윙데이즈. 김상선 기자
신명나는 국악과 절묘한 합…새 트렌드 진화
장영실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한복 입은 남자’. [사진 각 제작사]
이번 시즌에 이르면 역사는 재료일 뿐, 거의 완벽한 판타지로 확장된다. ‘장영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키웠다’는 발칙한 상상력을 펼친 무대가 ‘한복 입은 남자’다. 이상훈 작가의 동명 소설 원작으로 세종과 장영실의 인연을 소재 삼아 명나라와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하는 미스터리 판타지다.

자격루 등을 만든 조선의 천재 과학자로 왕의 총애까지 받았던 장영실이 갑자기 실록에서 사라진다. 17세기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던 PD 진석(이규형·카이·신성록)이 그림의 모델이 장영실이라는 가설을 마주하고 역사학자 강배(박은태·전동석·고은성)와 함께 추적에 나선다. 장영실의 모험 활극이 비틀린 역사를 재구성하는 현대인들과 평행우주처럼 교차되고, 별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꿈꿨지만 약소국의 희생양으로 제거된 장영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다 빈치의 비행기구 발명을 이끌었다는 ‘비밀’이 밝혀진다.

‘한복 입은 남자’의 영실 역 박은태. [사진 각 제작사]
‘환단고기 만큼이나 황당한 역사 왜곡’이라는 시선도 있지만 이 무대의 미덕은 무엇보다 재미있고 활기 넘친다는 점이다. 원작 자체가 고정관념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극중 진석은 “별의 밝기도 실시등급과 절대등급이 있어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어두운 별이 될 수도 밝은 별이 될 수도 있다”고 항변한다. 우리 역사도 세계사와 같은 선상에 놓고 보면 더 빛날 수 있다는 뜻인데, 픽션 안에서 진취적 세계관으로 설득력 있다.

무대의 완성도도 남다르다. ‘모차르트!’ ‘엘리자벳’ 등 유럽 뮤지컬 라이선스로 내공을 쌓은 제작사답게 근세 유럽과 조선을 ‘퀵 체인지’로 널뛴다. 서숙진 디자이너는 조선의 궁궐 실루엣을 오색찬란한 자개 텍스처로 표현해 로마 석조 건축의 거대한 무채색 기둥과 대비시키며 한국미를 강조했다. 작품의 시그니처인 거대한 두루마기도 압도적이다. 루벤스 그림을 찢고 나온 한복을 무용수들의 착장 퍼포먼스로 풀어낸 것도 신박하다. 아리랑 등 우리 민요의 선율을 변주해 녹여낸 이성준 작곡가의 넘버들도 중독적이다.

한복 입은 남자
시적인 엔딩도 몰입도가 높다. 별을 향한 영실의 꿈이 있었기에 우리가 날아오를 수 있었다는 듯, 객석 천장까지 별빛으로 뒤덮으며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세계관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는 “상실되고 삭제된 존재인 장영실이 꾸던 우주적인 꿈을 우리에게 확 와닿게 한 엔딩”이라며 “무대를 꽉 채워서 보여주려던 대극장 문법을 벗어나 비워두고 여백을 그려낸 연출”이라고 평했다.
한복 입은 남자
‘K뮤지컬 글로벌 확산’의 첨병인 대극장 뮤지컬의 화두는 차별화된 ‘K’ 고유의 미학 발굴이다. 엄홍현 EMK 대표는 “창작 뮤지컬을 많이 제작했지만 한국의 미학과 한국 사람을 소재로 만든 작품은 처음이라 고민이 많았다”고 했고, 윤호진 연출도 “‘명성황후’로 뉴욕에 갔을 때 음악은 서양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수태굿 장면도 넣고 태권도 춤사위도 추가했었다”면서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무대”라고 했다.

실제로 윤 연출은 ‘몽유도원’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에 대한 노하우를 집대성했다. 첨단기술로 구현한 ‘움직이는 수묵화’ 컨셉트의 무대부터 번지고 스며드는 정중동의 미학을 웅변한다. 수묵화를 활용한 미디어아트 창시자 탁영환 대만 타이난응용과기대 교수가 직접 한지에 그린 그림을 디지털로 편집한 수묵 애니메이션이 관통하는 유니크한 무대다.

“이런 작품은 브로드웨이서도 처음일 것”
몽유도원
오상준 작곡·김문정 음악감독의 음악은 서정적인 사랑노래와 타악 리듬, 태평소 가락 같은 국악의 개성을 전면에 내건 강렬한 넘버들이 절묘한 합을 이룬다. 정가 가객 하윤주와 소리꾼 정은혜가 부르는 우리 소리의 다양한 질감도 돋보인다. 특히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요’로 편곡해 도처에 듬뿍 끼얹은 ‘아리랑’이 ‘킥’이다. ‘도원’을 잃은 목지국 백성들이 정처 없이 떠나며 제사장 비아(정은혜·홍륜희)와 아리랑을 함께 부를 때 비극의 한가운데서 희망의 춤이 탄생하는 명장면도 잊을 수 없다. BTS 신보 ‘아리랑’과 동반 상승효과도 기대할 법하다.
몽유도원
뜻밖의 하이라이트는 개로왕과 도미의 바둑 대결신이다. 개로왕이 바둑에 빠져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한 장면인데, 가장 정적인 바둑을 한국무용 댄스 브레이크로 만들어 허를 찔렀다. 흑돌과 백돌의 대결을 춤싸움으로 시각화해 역동적인 춤사위를 신들린 국악 리듬에 얹어 우리 가무악의 매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것이다.

“최인호 작가 생전에 이 작품이야말로 세계 어디에 내놔도 감동할만한 소재라고 공감했었다”는 윤 연출은 2028년 브로드웨이 진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현지에서 영어버전 제작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다. 그가 해외 메이저 시장에서 내세울 무기로 꼽은 ‘동양 미학’의 내용도 흥미롭다. 그는 “도미가 눈이 멀고 아랑이 스스로 얼굴을 파괴했을 때 사랑의 본질에 도달한다는 것은 파괴로부터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는 동양의 미학이다. 이런 작품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도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창작뮤지컬 60주년, 대극장 뮤지컬이 이제는 K헤리티지로부터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창조해 세계를 겨냥하고 있다. 노(能) 등 전통예능의 매력을 잘 살린 일본 음악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한국은 물론 중국·영국에서 장기공연에 성공한 사례도 고무적이다. 최승연 평론가는 “‘몽유도원’은 모든 장면이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뚜렷한 마스터피스”라면서 “일본어 공연 ‘센과 치히로’가 일본적 에센스로 외국인들을 매료시키는 것처럼 자막 번역을 잘해서 우리말로 가면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영국에서 단 1회 공연을 한 ‘외쳐, 조선!’이 최근 ‘브로드웨이월드 UK/웨스트엔드 어워즈’ 최우수 콘서트 프로덕션 상을 받았듯, ‘정품 K’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편성보다 K 고유의 미학을 고도화하는 게 첨단 K트렌드의 방향성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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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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