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맞다’에 “누가 수지 때렸냐”... ‘고지식하다’ 말하면 칭찬?

오주비 기자 2026. 2. 7.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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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문해력 위기] [1] 초·중·고 때부터 글읽기 부족
서울 양천구 정목초등학교에서 열린 2024 서울 학생 문해력 수리력 진단 검사에서 4학년 학생들이 검사 준비를 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지난 2일 오후 12시 30분 서울 A초등학교 도서관. 점심시간을 맞아 복도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장서 1만4000권이 빼곡한 도서관은 적막강산이었다. 점심시간 내내 도서관을 찾은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오후에도 도서관에 온 학생은 4학년 1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서가에 들어서자마자 만화책 코너로 직행했다. 사서 김모(59)씨는 “유튜브 쇼츠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라며 “그래도 고학년이 ‘정기간행물’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걸 보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본지가 교총과 함께 전국 초·중·고 교사 941명을 조사했더니, 학교 현장의 ‘문해력 붕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성적이 낮은 학생 한두 명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수 학생의 문해력이 떨어져 정상적인 수업 진행이 힘든 곳이 많았다.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는 ‘어휘력 공백’이었다. 22년 차 고교 지리 교사는 “‘배타적 경제 수역’을 가르치려면 ‘배타적’이 뭔지, 배타적이 남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하면 배척은 또 무엇인지 알려줘야 한다”면서 “한글을 영어 독해하듯 가르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경기 지역 한 고교 교사도 “‘민영화’라는 단어를 설명하느라 본 수업은 시작도 못 했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아이들은 단어를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부산 한 중학교 영어 교사는 ‘수지가 맞다(이익이 남는다)’는 글을 읽다가 당황했다. 한 학생이 “누가 수지를 때렸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강원 한 초등학교에선 ‘고지식하다’를 칭찬인 줄 알고 “우리 선생님은 고지식해”라고 노래 가사를 쓴 학생도 있었다. ‘그릇된 행동’이란 표현을 보고 “왜 갑자기 밥그릇 얘기가 나오느냐”고 물은 고등학생도 있었다.

학습은 결국 글을 읽고 핵심을 파악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요즘 학교엔 글 읽기 자체를 어려워하는 학생이 많다. 서울 한 초등 교사는 “교과서 4쪽이 넘어가면 아이들이 집중력을 잃고 딴짓하거나 읽고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광주 한 초등 교사도 “문제가 요구하는 게 뭔지 몰라서 수학 문제를 못 푸는 일이 잦다”고 했다.

교사들은 문해력 저하의 주범(복수 응답)으로 ‘디지털 기기 과사용(88.6%)’과 ‘독서 부족(63.9%)’을 지목했다. 그다음은 ‘생성형 AI 의존도 증가’(19.1%)였다. 디지털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고 책 보는 시간이 줄어든 것이 핵심 이유라는 것이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자료 검색조차 안 하는 학생도 부지기수다. 매년 탐구 보고서 쓰기 수업을 하는 이모(40) 고교 수학 교사도 AI 도입 전후 극명한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재작년만 해도 “이런 주제도 괜찮나요?” 등 질문을 받았는데, 작년엔 묻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이 교사는 “알고 보니 주제 정하기부터 내용까지 모든 걸 AI에 물어봐서 썼더라”며 “학생부에 독서 내용 기재해달라고 찾아오는 상위권 학생도 10명 중 8명은 챗GPT가 요약해 준 걸 읽었다더라”고 했다. 교사의 82.5%는 ‘생성형 AI 사용이 학생 문해력을 떨어뜨린다’고 답했다.

교사들은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고 독서 활동을 늘리는 게 해법이라고 봤다. 문해력 개선 방안에 대해 71.4%가 ‘독서 활동 강화’를 가장 많이 꼽았다. 효과적인 독서 교육 방법으로 ‘학교의 다양한 교과목 수업에 독서 활동을 포함하는 것’(43%)이란 대답이 많이 나왔다. 그다음은 ‘0교시 독서 등 학교에서 수업 외 별도 독서 시간 지정(20.7%)’이었다. 이순영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문해력 붕괴 현상을 막기 위해선 학교 교육에 독서를 편입시켜 모든 학생이 최소 수준 이상의 문해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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