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interview] “저는 레전드가 아닙니다” 책임과 겸손으로 버틴 ‘독사’ 이웅희의 프로 15년 (1편)

[포포투] 'IF'의 사전적인 의미는 '만약에 ~라면'이다. 은 '만약에 내가 축구 기자가 된다면'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누구나 축구 전문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고 있는 'No.1' 축구 전문지 '포포투'와 함께 하는 은 K리그부터 PL, 라리가 등 다양한 축구 소식을 함께 한다. 기대해주시라! [편집자주]
‘독사’라는 별명처럼, ‘선수’ 이웅희는 날카로운 눈매와 묵직한 카리스마로 상대를 압도하던 수비수였다. 그래서인지 그를 만나기 전, 인터뷰 현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사무실을 찾은 그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먼저 건네 온 인사와 부드러운 미소는 단숨에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인터뷰 내내 그가 보여준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강렬함보다 훨씬 깊고 단단했다. 그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철저히 객관화된 시선으로 담담히 되짚었다. 베테랑 특유의 권위 대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이 그의 말 사이사이에 배어 있었다. 그 태도에서 오랜 시간 현장을 버텨온 선수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제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그라운드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스카우트와 테크니컬 디렉터라는 새로운 역할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서지는 않았지만, 15년 동안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이웅희.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IF 기자단 6기’가 마주 앉았다.

-현역 시절에는 아무래도 ‘경기 일정’이 삶의 기준이었을 텐데, 지금은 생활 리듬에 변화가 체감되나요?
선수 때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야 했어요. 지금도 규칙적인 생활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책을 읽다가도 ‘1시간만 더 자야지‘하고 낮잠을 잘 수도 있고, 그런 부분들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는 ‘선수’ 이웅희가 아닌, ‘남편’이자 ‘아빠’ 이웅희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것 같습니다. 요새 육아를 하시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게 있을까요?
천안에 있었던 마지막 2년 동안은 주말부부로 지내서, (가족을) 주말에만 보러 갔어요. 이제는 같이 지내보니까 ‘우리 와이프가 육아하느라 많이 힘들었겠구나’라고 느껴요. 아이가 ‘조금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들어요. 조금 더 크면 아빠랑 안 논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 학창 시절

TV 속 한 장면이, 한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 이민성 감독의 중거리 골을 보고 공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던 기억은 프로 선수 이웅희의 출발점이었다. 사이드백에서 센터백으로, 고향 대전에서 ‘로컬 보이’로 프로 데뷔까지. 남들이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가장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린 시절의 이웅희에게 축구 선수를 꿈꾸게 한 특별한 순간이 있었나요?
제 기억에 축구를 제일 처음 TV로 본 건 도쿄 대첩 당시 이민성 감독님의 왼발 중거리 슛 장면이었어요. TV에서 그 장면을 보고 공을 가지고 나갔던 기억이 있어요. 그 이후로 축구를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전문적으로 축구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에 부모님께 졸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4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되고 축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보통 학창 시절에 여러 포지션을 오가는 일이 잦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웅희 선수는 언제, 어떻게 수비수로 정착하게 됐나요?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는 사이드백을 봤어요. 이제 프로에 올라가면서 유상철 감독님께서 한 번씩 저를 중앙 수비수로 기용하시고, 조진호 감독님께서 ‘한번 바꿔봐라, 바꿔보자’라며 중앙 수비수를 권해 주신 게 아예 포지션을 바꾸게 된 계기인 것 같아요.
-유성생명과학고와 배재대를 거쳐, 대전에서 프로 데뷔까지 이뤄낸 ‘로컬 보이’로 알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을 보내며 자란 도시에서 프로 선수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어떤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셨나요?
대전 출신으로서, 프로를 대전으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더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 팬 분들께서 ‘대전의 아들’이라는 별명도 지어주신 만큼, 그에 걸맞게 모범적으로 프로 생활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 선수 시절: ‘백업’ 선수에서, FC서울 ‘레전드’로

이웅희의 커리어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프로 생활 초반기, 그는 2군 멤버로 시간을 보내며 K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마주했다.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고,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버텼고, 마침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 경기, 한 장면씩 신뢰를 쌓아 올리며 점차 팀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이웅희는 FC서울에서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새기며 커리어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레전드’라 부르지 않는다. 결과보다 과정을, 평가보다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태도였다. 오랜 시간 같은 유니폼을 입고 팀을 지켜온 선수다운 겸손함이었다.
-프로 데뷔 초반, ‘내가 K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가장 컸던 시기와 이를 극복하게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첫 프로 진출 이후에 동계 훈련을 갔는데, 선수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느낌이었어요. 시즌 시작 후에도 ‘주전 기회가 오는 것은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다행히 컵 대회에서 간간이 출전했고, 리그에서도 교체 멤버로 기회를 받았어요. 나름대로 그 위치에서 제가 가진 장점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빛이 잘 안 보인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여름에 유상철 감독님이 오셨어요. 그리고 서울에서 임대 선수가 왔는데, 오자마자 크게 다쳐서 그때부터는 제가 시즌 끝날 때까지 모든 경기를 뛰었어요. 저를 너무 좋아해 주셨고, 제 장점을 살려 주려고 하셨고. 지금은 안 계시지만,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FC서울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팀의 레전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FC서울은 이웅희 선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팀인가요?
좋은 기억이 많은 팀입니다. 처음 고향을 떠나 살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도 서울과 함께했기에 애정이 많은 팀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서울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제가 서울에서 레전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팬분들, 구단 관계자분들께서 좋게 기억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죠. 제게 서울은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어준 팀이고,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FC서울 시절, 특히 최용수 감독님과의 호흡이 좋았는데, 감독님은 어떤 지도자였나요?
대전에서 서울로 저를 데려가 주신 분이세요. 처음부터 주전감으로 영입한 건 아니었지만,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셨고 제가 그 기회를 잘 잡도록 꾸준히 신뢰를 보내 주셨던 것 같아요. 유명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신 분입니다.
-감독님과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경기 전 감독실에 모여 주전으로 나갈 선수들이 각자 좋아하는 팀, 자신의 장점을 하나씩 말하라는 시간이 있었어요. 제 차례가 다가올수록 고민이 많았는데,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자신이 없어서 그냥 ‘책임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신 감독님이 굉장히 좋아해 주셨던 기억이 나고, 그 장면이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2014년에는 김진규-김주영 선수와 함께 백3 라인을 구성하며 ACL 4강까지 올랐습니다. 그 시즌은 이웅희 선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너무 좋았죠. 서울에서의 첫해였는데, 세 명의 조합이 완벽했던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수비 성향도 비슷했거든요. 사실 도움을 많이 받았죠. 진규 형은 수비 리딩, 컨트롤 등 리더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고, 주영이는 당시 국가대표에 K리그 정상급 수비수였잖아요. 제가 부족한 부분을 두 선수가 커버해 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유명하고 능력 있는 선수들과 조화를 이루고, 최고의 시즌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수 시절: 고향 대전으로의 귀환,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

커리어 후반부에 접어든 이웅희는 고향 대전으로 돌아가 재창단된 팀의 새 출발을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 결정에는 개인의 성취보다 팀과 팬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후 강원FC를 거쳐 천안FC로 향한 그는 베테랑으로서 팀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충실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화려함보다는 책임을, 주연보다는 버팀목을 택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이웅희는 15년에 걸친 선수 생활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마무리했다.
-2020년 당시 2부 리그였던 대전으로 돌아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고향 팀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팀이 새롭게 창단할 때 돌아가고 싶었어요. 적은 나이가 아니기도 했고, 대전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면 ‘뿌듯하겠다,’ ‘뜻깊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적했습니다. 돌아가서도 팬분들이 많이 좋아해 주셨고, 구단에서도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네요.
-복귀 이후 유니폼 판매 1위를 기록할 만큼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는데, 다시 한번 대전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았을 때 감정은 어땠나요?
사실 유니폼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잘 몰랐어요. 지금은 대전 팬이 어마어마하게 많잖아요. 근데 처음 재창단했을 때는 예전 대전 시티즌과 비슷한 면이 있었어요. 그때의 ‘향기’를 공유했던 선수라고 생각해 주신 것 같아 팬분들께 정말 감사했고, 그 응원을 받는 저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린 시절 뛰었던 대전 시티즌과, 기업 구단으로 재창단한 대전 하나 시티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가장 큰 차이점은, 다들 아시다시피 자금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은행이라는 대기업이 지원을 해주면서 재정적으로 훨씬 풍족해졌죠. 여기에 적극적인 투자까지 더해진 게 결국 짧은 시간 안에 대전이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라고 봅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만큼 구단의 방향성이 많이 개선되었을 거고, 그 변화가 팀에 잘 받아들여지도록 내부 관계자분들께서 함께 노력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대전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대전은 앞으로 K리그를 선도하는 빅클럽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천안 시티 FC에서 많은 베테랑 선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 시간이 선수님께는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나요?
사실 선수단에 말이 안 될 정도로 베테랑 선수들이 많았어요. 저는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어쨌든 2년 연속으로 주장을 맡았고요. 베테랑 선수들이 많은 구조가, 사실 팀이나 감독님 입장에서도 관리가 쉽지 않았을 거거든요.
다행히도 2년 동안 잡음 없이 잘 유지됐는데, 그런 부분이 주장으로서, 리더로서 큰 경험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 경험이 훗날 제가 또 리더의 위치에 서게 될 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고, 축구를 떠나서도 관계 형성에 있어 뜻깊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독사‘ 이웅희, 투쟁심으로 쌓은 328경기

이웅희가 기록한 328경기라는 숫자 뒤에는 특별한 비결보다, 오랜 시간 흔들림 없이 지켜온 태도가 있었다. ‘독사’라는 별명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몸 관리, 매 경기 임하는 자세, 사생활과 운동을 분명히 구분하는 자기 관리, 그리고 수비수라는 역할에 대한 책임감까지. 그가 15년 동안 K리그 무대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스스로를 대하는 방식에 있었다. 화려함보다 기본을, 순간의 투쟁심보다 꾸준함을 선택해온 시간이 ‘독사’ 이웅희를 만들었다.
-K리그 통산 328경기를 소화하며 오랜 기간 커리어를 이어올 수 있었던 몸 관리 비결이 궁금합니다. 또 투쟁적인 스타일로 ‘독사’라는 별명을 얻으셨는데, 이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독사’라는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어요. ‘독하다’라는 뜻이니까요. 스스로를 돌아보면 축구적인 기술이나 테크닉이 아주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른 장점을 살려야겠다고 느꼈어요. 그중 하나가 몸 관리였습니다. 선수 생활 내내 몸 관리에 대해서는 늘 많이 신경 썼어요. 보통 몸 관리라고 하면 좋은 걸 먹고, 좋은 데 가는 걸 떠올리지만, 저는 오히려 ‘나쁜 걸 안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건강에 안 좋은 행동을 하고 나면 늘 찝찝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기분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전날 몸에 안 좋은 걸 했는데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다면, 그건 이미 잘못됐다고 봤거든요. 그 찝찝함이 싫어서 같은 상황이 오면 스스로 제동을 걸었고, 그런 선택들이 쌓이면서 제 생활의 일부가 됐습니다. 그렇게 생긴 습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필드 위의 이웅희와, 필드 밖의 이웅희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운동장 안에서의 저와 밖에서의 제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인 세계는 같을 수 있지만, 일을 할 때의 저와 일을 하지 않을 때의 저는 거의 다른 사람에 가까운 것 같아요. 축구장 안에서는 굉장히 냉정했고, 잘 타협하지도 않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만큼 축구를 할 때만큼은 정말 ‘일’처럼 철저하게 임했던 거죠.
반대로 운동장을 벗어나면 오히려 감성적인 편이에요. 밖에서는 훨씬 부드러운 면도 많았고요. 축구장 안에서는 그런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정리하면 필드 안에서는 냉정을 유지하려 했고, 필드 밖에서는 조금 더 유하고 감성적인 모습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수비수는 90분 동안 잘하다가도 한 번의 실수로 평가가 크게 달라지곤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15년이라는 시간을 버티게 한, 수비수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은 무엇이었나요?
수비수로서는 실점 안 하고 경기를 끝내는 게 가장 큰 희열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매 경기 수비수에게는 최고의 결과죠. 득점을 하는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만족감도 자연스럽게 그쪽에서 오는 것 같아요.
선수 생활 내내 실점할 수 있다는 스트레스는 늘 있었어요. 경기 내내 그 부담을 안고 뛰는 게 수비수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을 때만큼은 마음이 가장 편안했고, 그 짧은 평온함이 수비수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자 희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비수임에도 득점이 적은 편은 아닙니다. 기억에 남는 세리머니나 득점 장면이 있을까요?
세리머니는 따로 기억에 남는 건 없어요. 제가 세리머니를 했던 기억도 잘 안 나고요. 대신 아크로바틱한 골을 몇 골 넣었던 기억은 남아 있어요. 그 골들이 모두 결승골이어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상대가 서울이어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서울을 상대로 세 골이나 넣었더라고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득점은 강원 시절이에요. 승리가 없던 상황에서 제가 결승골을 넣으면서, 두 달 만에 첫 승을 거뒀던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투쟁심과 책임감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이웅희의 선수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화려한 조명보다는 꾸준함으로, 말보다 행동으로 커리어를 증명해 온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15년은 끝이 아니라 토대에 가깝다. 그라운드 위에서 쌓아온 시선과 기준은 이제 새로운 자리에서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IF 기자단의 말: 이웅희 선수의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콘텐츠 제작=‘IF 기자단’ 6기(김용성, 김유하, 김한슬, 민준홍, 이태훈, 정동민, 하지오)
정지훈 기자 rain7@fourfourtw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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