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떼일 걱정 사라진다... 퇴직연금 20년 만 의무화
사업장 규모별 단계적 의무화
영세·중소기업 부담 완화 관건

퇴직금을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하는 퇴직연금 도입이 모든 사업장에 의무화된다. 퇴직금을 사내에 쌓아놓는 대신 사외에 별도로 적립하면 회사가 경영난을 겪더라도 퇴직금이 안정적으로 보장돼, 영세·중소기업에서 빈번한 퇴직금 체불 사례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는 6일 서울 영등포구 켄싱턴호텔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10월 발족한 노사정 TF에는 고용노동부, 한국노총·민주노총, 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 등이 참여했다. TF는 △퇴직급여 사외적립(퇴직연금) 도입 의무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두고 세부 내용을 논의해왔다.
퇴직연금은 1961년 도입된 사내 적립형 퇴직금 제도가 회사 재정 상태에 따라 체불이 발생하는 등 불안정하게 운영되자, 그 대안으로 2005년 도입됐다. 퇴직금을 회사 금고에 쌓아두지 말고 회사 바깥 금융기관에 맡겨 설령 회사가 문을 닫더라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의무가 아니다 보니 퇴직연금 도입률은 26.5%(43만5,000곳·2024년 기준)에 그치는 등 저조했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도입률이 92.1%에 달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10.6%로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이도 컸다. 2012년 이후 신설된 사업장에는 퇴직연금 도입이 의무화됐지만 과태료나 형사처벌 규정은 없어 이 역시 도입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총 임금체불액의 약 40%를 퇴직금이 차지할 정도로, 영세·중소기업 근로자의 퇴직금 체불은 고질적인 문제가 됐다.
노사정은 이에 따라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 제도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대신 영세·중소기업의 재정적 부담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실태조사를 거쳐 사업장 규모별로 도입 시기에 차등을 두고 정부 지원 방안도 마련한다. 또 퇴직연금이 의무화돼도 근로자가 퇴직연금 계좌에 있는 돈을 일시금으로 받거나 중도인출하는 것은 계속 가능하도록 했다. 노사정 TF의 논의 과정에서는 퇴직연금 도입 미이행 시 과태료나 이행강제금을 물리는 제재 규정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해 이번 선언문에는 담기지 않았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선택지'로만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을 위한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도 도입한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는 여러 사업장이 퇴직연금을 하나로 통합해 규모가 큰 기금처럼 운용하는 제도다. 그간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한 대부분 기업들은 개별 사업장 단위로 금융기관에 운용을 맡기는 '계약형' 제도를 운영해 왔다. 제도 시행 20년이 됐지만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은 2.07%에 불과해 같은 기간 평균 물가상승률(2.3%)에도 미치지 못했다. 퇴직연금의 90% 이상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는데, 기업 담당자는 위험을 감수할 유인이 없고 개인은 투자 전문성이 떨어지는 구조 속에서 자산이 저수익 상품에 방치됐기 때문이다.
이에 노사정은 기금화를 통해 굴릴 수 있는 자금액을 키워 '규모의 경제'를 통한 수익 향상을 유도할 계획이다. 다만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을 폐지하거나 기금형으로 일원화하지 않고 계약형 제도와 기금형을 병행 운영하면서 가입자의 선택 폭을 늘릴 방침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현행 확정기여형(DC형) 방식에만 새롭게 적용된다. DC형은 회사가 법정 부담금만 내고 근로자 본인이 운용을 결정해 수익과 손실에 책임을 지는 구조다. 회사가 퇴직금 운용에 책임을 지고 퇴직 땐 확정 금액을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확정급여형(DB형)은 현행 방식을 이어간다. 노동자 입장에선 기존 DB형을 계속 유지하거나, DC형을 선택한 경우에도 기금형을 여러 운용 방식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는 셈이다.
기금형 퇴직연금 운용 방식도 다양화했다. 우선 △금융기관 개방형(은행·증권·보험사가 별도 수탁법인 세워 공동 운용) △연합형 기금(복수 사용자가 연합해 공동 수탁법인 운영) 방식을 두기로 했다. 현행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도 활성화한다.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푸른씨앗'은 현재 상시근로자 30인 이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데, 300인 이하 사업장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의 운용 주체로 많이 예상됐던 국민연금공단은 연합형이나 공공기관 개방형 등 형태로 참여할 전망이다. 노사정은 최근 국민연금이 환율 방어에 동원되는 등 정책적 목적으로 쓰인다는 비판을 의식해, 퇴직연금을 '오직 가입자의 이익만을 위해' 운용해야 한다는 수탁자 책임도 분명히 했다.
중소기업 부담 해소 방안은 과제

근로자의 노후 보장 강화라는 의도는 환영할 만하지만, 영세·중소기업 사업주의 구체적인 부담 완화 방안이 없으면 선언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장을 지낸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내부에 퇴직금을 쌓아 내부 자금으로 쓰던 기업들이 사외 적립을 해야 하면 부담이 커진다"며 "큰 방향을 제시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제도 시행을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정부는 이번에 노사정이 큰 틀에서 합의한 원칙에 대해 입법 등 후속작업을 서두를 방침이다. 세부적인 이행 방안은 향후 사회적 협의체에서 추가 논의한다. 노동계는 1년 미만 근속자와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 등 퇴직연금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합의가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노사정이 모두 참여한 사회적 선언으로 첫발을 뗐으니 추진 과정에 힘이 더 실릴 것"이라고 환영했다.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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