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파의 시선] 4천억 '탈세왕' 마저 감싸는 국세청의 비밀주의

지난해 12월 뉴스타파는 탈세 체납액이 4천억 원이 넘는 한국인 선박왕 권혁 씨의 횡령 의혹 등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성수기 기준 하루 70억 원 가량을 벌어들일 것으로 추정되는 시도해운의 회장 권혁 씨는 지난 2011년 4,300억 원의 세금을 부과받았지만 갖은 법기술을 동원해 14년째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채 버티고 있다. 뉴스타파는 ‘법 위의 선박왕’ 연속 보도를 통해 권혁 씨가 호화 생활을 위해 회사 돈 수십억 원을 횡령하고 천억 원이 넘는 자금을 해외에서 국내로 들여와 부동산 등에 투자한 의혹을 보도했다.
세금체납 1위 권혁, 2024년에는 왜 누락됐나
뉴스타파가 ‘법 위의 선박왕’ 첫 보도를 내놓은 바로 다음 날, 국세청은 고액 상습 체납자의 명단을 공개했다. 1위는 당연히 3,938억을 체납한 권혁이었다. 법인 부문에서도 1위부터 4위까지가 모두 권혁과 관련된 법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국세청은 고액 상습 체납자의 명단을 매년 공개하는데, 압도적인 세금체납 액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권혁은 단 한 번도 이 명단에 오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이에 대해 “권혁이 제기한 세금 부과 취소 소송의 확정 판결이 지난해에야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세청의 설명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국세청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권혁의 소유로 의심되는 국내 자산을 압류해왔다. 이미 권혁을 세금 체납자로 간주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유독 세금 체납자 명단에서 권혁을 누락시켜온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국세청의 해명을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2024년의 누락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권혁이 제기한 개인종합소득세 부과 취소 소송의 확정 판결은 24년 7월 11일에 났기 때문이다. 국세청의 해명이 맞다 치더라도 확정 판결 이후인 2024년 연말의 체납자 명단에는 권혁이 포함되었어야 했다.
뉴스타파는 지난해 12월 15일 국세청에 질의서를 보냈다. 여러 질문 중 하나로 권혁이 2024년 체납자 명단에서 누락된 이유를 물었다. 국세청이 보내 온 답변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빠져 있었다. 다시 물었다. 국세청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세청이 답을 주지 않으니 상상을 해볼 수 밖에. 가장 공격적인 상상은 국세청이 권혁을 일부러 봐줬다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상상은 해당 업무를 맡은 국세청 직원의 단순 착오가 있었다는 것이다. 권혁이 제기한 소송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해마다 하던대로 명단을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두 가지 상상 중에 무엇이 맞는지 가려보자는 뜻은 전혀 없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건 이런 상식적이고 단순한 질문에도 답변을 하지 않는 국세청의 ‘비밀주의’다.
무적의 ‘국세기본법 81조의 13’
뉴스타파가 보낸 다른 질문에는 국세청이 답변을 했다. 그러나 그 답변들은 대부분 안 한 것과 마찬가지인 답변들이다. 예를 들어 보자.

권혁 회장의 해외 자금 천억 원 국내 유입과 관련해 국세청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세무조사나 자금 출처 조사를 했는지 질의했지만 국세청의 답변은 위와 같았다. 권혁에 대한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세청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고 있는 국세기본법 제81조의 13은 “세무공무원은 과세 정보를 타인에게 제공 또는 누설하거나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무리 악질적인 고액 상습 체납자라 해도 국세청은 이 조항에 근거해 체납자의 정보를 철저히 보호한다.
과거 뉴스타파는 여러 차례 해외 언론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 자산가들의 해외 은닉 재산을 대거 발견해 보도했다. 2013년 오프쇼어 리크스, 2016년 파나마페이퍼스, 2021년 판도라 페이퍼스 등이 대표적이다. 그때마다 국세청은 뉴스타파에 세금 추징을 위한 자료를 요청해왔다.
그러나 뉴스타파가 제공한 자료를 가지고 누구로부터 세금을 얼마나 징수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세금 추징 총액만을 공개했을 뿐이다. 뉴스타파를 비롯한 언론들은 천문학적인 해외 자산을 숨겨놓은 자산가들이 각각 얼마의 세금을 냈는지, 그 세금은 적정한 수준인지, 세금 징수 과정에 봐주기 등 문제는 없었는지 등을 감시하고 검증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비밀주의’가 보호하는 것은 납세자의 정보 뿐인가
물론 납세자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명목으로 만들어진 ‘비밀주의’의 두꺼운 커튼 뒤에 국세청의 부실 행정이나 국세청 직원들의 사적인 이해 추구마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사례들이 있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국세청 전직 공무원 손 모 씨의 사례가 그렇다. 현직 시절 권혁 회장의 국내 자산 압류와 세금 추징을 담당했던 국세청 공무원 손 씨는, 퇴직 뒤 곧바로 권혁 회장의 계열사에 취업해 5년 합계 20억 원 가량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그는 현재 부정 처사 후 수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현역 시절 손 씨는 권혁 회장에게 어떤 도움을 줬을까. 그는 스스로 작성한 진술서에서 “현역 시절 권혁 회장에게 1,000억 원 이상의 이득을 줬다”고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국세청 직원이 고액 체납자에게 1,000억 원 이상의 이득을 줄 수 있는 걸까. 뉴스타파는 여기에 대해서도 질의를 했지만 국세청의 답변은 이랬다. “손 씨의 재취업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다. 퇴직자이므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손 씨의 행각은 다행히 권혁과 손 씨 두 사람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제보자 최관순 씨에 의해 폭로됐다. 역으로 말하면 만약 최 씨가 제보를 하지 않았다면 국가의 조세권을 활용한 세무공무원의 사적 이해 추구가 영영 어둠 속에 묻힐 뻔했다는 얘기다. 국세 행정이 예의 ‘비밀주의’에 의해 은폐되지 않는다면 손 씨가 이렇게 대담하게 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게 가능했을까. 애초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비밀주의’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자신감이 없었다면 손 씨가 그렇게 노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국세청 공무원으로 퇴직하면 빌딩을 산다”는 항간의 수군거림과 국세청의 ‘비밀주의’가 정말로 무관한 것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권혁의 세금 추징에 대한 정보가 낱낱이 공개되어 지속적으로 언론의 감시를 받고 대중들의 관심 아래 놓여있었다면, 권혁은 14년 동안 세금 납부를 뭉갤 수 있었을까? 14년 동안 권혁의 세금을 걷지 못한 국세청의 무능이 정치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을까?
고액 상습체납자는 예외로 해야
법에서 납세자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도록 정해 놓은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적 관심사가 된 납세자의 정보까지 국세청이 ‘비밀주의’로 꽁꽁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실익도 없어 보인다. 실제 국세청은 위 비밀보호 조항에도 불구하고 고액 상습 체납자의 명단을 해마다 공개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 명단 공개 역시 국세징수법과 국세기본법 등 법률에 따른 것이긴 하다.)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은 비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뉴스타파가 수년 전 보도한 것처럼, 노르웨이의 경우 모든 시민의 소득과 자산, 납세액을 온라인으로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스웨덴은 매년 지역별 소득 상위자의 명단과 납세 정보를 담은 책자를 발간하며, 누구나 이를 구입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핀란드는 매년 11월 납세의 날에 국세청이 고소득자들의 소득과 세금 상세 내역을 언론에 배포한다.
미국은 개인 정보 보호에 민감한 나라지만, 공적 인물의 탈세 의혹처럼 중대성이 큰 사안에 대해서는 국회나 언론이 정보공개법에 의거한 소송을 통해 국세청의 조사 과정이나 집행 현황을 감시할 수 있다. 지난 2022년 미 하원 세입위원회가 대법원 판결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세무 신고서를 확보한 게 대표적 사례다.
조세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납세자들의 신뢰다. 국세청의 비밀주의는 “우리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그냥 맡겨두고 신뢰해 달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비밀주의의 두꺼운 커튼이 간혹 살짝 젖혀질 때마다 언뜻 언뜻 보이는 모습은 납세자들로 하여금 신뢰가 아니라 강한 의심을 품게 만든다. 커튼 뒤가 드러난 권혁의 사례를 보면 국세청이 그토록 신봉하는 ‘비밀주의’가 실은 납세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자신들의 무능과 유착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는 가림막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체납 세금 추징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해왔다. 국세청이 그 의지를 정말 실현할 마음이 있다면 권혁 같은 고액 체납자의 세금 추징 과정을 공개하고 언론과 시민의 감시를 받도록 해보자. 단기적으로는 국세청의 무능과 부실이 드러나는 아픔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국세 행정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다른 고액 상습 체납자들의 체납 유인은 크게 낮아질 것이다. 한 번 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뉴스타파 심인보 inbo@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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