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쓴 글이 누군가를 살리는 글이 되다

민바람 2026. 2. 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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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되는 이야기] 성폭력 피해생존자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

영화 〈한공주〉는 성폭력 생존자인 고등학생 공주의 이야기를 다룬다. 애석하게도 영화 속에서 공주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바라보고 치유해주는 인물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경찰과 교장은 공주를 문제시하며 2차 가해를 하고, 공주에게 지낼 곳을 마련해준 학교 선생님과 선생님의 어머니도 내심 그를 짐으로 여긴다. 가장 의지가 되어야 할 부모는 오히려 공주를 방치하거나 이용한다.

공주는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언젠가 다리 밑으로 투신할 때를 대비해 수영을 배운다. 수영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을까 봐.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 성폭력 생존자인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한공주〉(이수진 감독, 2014)의 한 장면. 공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 혼자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공주에게 기타와 노래는 피해자성에서 벗어나 자기다움을 느끼며 아픔을 잊는 수단이다. 그리고 수영은 계속 살아가기 위한 필사의, 아니 필생의 노력이다. 누군가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 분투하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 대응 과정에서 느낀 막연함과 고립감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은 기분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엘렌 베스, 로라 데이비스 공저, 이경미 번역, 동녘)에서는 “많은 생존자들이 심각한 고립상태에 놓여있다.”고 지적한다. 나 역시 성추행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무척 외로웠다. 살면서 다양한 성추행을 겪어왔음에도, 사건에 직면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막연했다.

정보를 구하기 위해 여러 키워드로 검색해 보며 깨달은 의외의 사실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정보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었다. 제일 많이 보이는 건 로스쿨이나 개인 변호사의 홍보 글이었는데, 고소 대상이 된 사람을 위한 글이 더 눈에 띄었다. 3년 전인 당시에는 피해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나 대응을 위한 정보가 쭉 정리된 곳이 쉽게 노출되지 않았고, 기관이나 홈페이지로 각각 찾아야 했다.

나는 우선 법률 자문 사이트에서 변호사에게 유료 전화 상담을 받았다. 이후 한국여성의전화(hotline.or.kr) 사무실에서 주 1회 제공하는 무료 법률 상담을 예약해 15분 대면상담을 받았다.

또, 지인을 통해 대한법률구조공단(klac.or.kr)을 알게 되어 그곳에서도 짧은 대면상담을 받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법률 지식 부족으로 법적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과 소송 지원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짧은 상담으로는 사건 해결에 필요한 조언을 충분히 얻기 어려웠고, 마음은 어지럽기만 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해바라기센터(sunflowercenter.or.kr)를 안내받았다. 해바라기센터에서는 수사, 법률, 의료, 상담, 심리 지원을 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정기적으로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다른 문제가 아닌 성폭력에 의한 심리적 문제라는 점을 입증해야 했다. 심리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내 경우 이전부터 겪어온 정신적 문제들이 있어서 지원받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도 정보를 알아보고 고민하면서 여러 차례 해바라기센터와 통화했다. 그리고 네 번째 전화 상담에서 비로소 집에서 가까운 곳에 성폭력·가정폭력상담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화로 약속을 잡고 찾아가니, 상담사가 50분 동안 사건의 경위에 대해 매우 상세히 묻고 기록했다. 국선변호사에게 전화 문의를 할 수 있게 연결도 해주었고, 주 1회 진행하는 무료법률상담에서 사선변호사와 상담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여러 곳에 총 열 번 넘게 문의하며, 나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 곳에 가니 다른 곳을 알게 되고, 거기서 또 다른 곳을 알게 되는 식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장 나중에 알게 된 상담소에서는 꾸준히 함께 의논해줄 대상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아 다행스러웠지만,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정보를 얻고 고민하는 과정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생각도 감정도 복잡해 새벽마다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럴 때 24시간 상담에 응해주는 정신건강상담전화에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나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밤은 거의 매일 반복되었다. 이 과정을 헤쳐가야 하는 건 나였고,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였다. 세상에 나 혼자인 기분이 들었다.

왜 사건에 대응한 성폭력 피해 당사자의 기록은 잘 보이지 않을까?

사건 해결 절차에 대한 정보에도 목말라 있었지만, 내게 더욱 절실했던 것은 당사자의 목소리로 써내려간 글이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여성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고 싶었다. 나중에는 『김지은입니다』(김지은 저, 봄알람, 2020) 등 성폭력 생존자의 수기를 읽으며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책을 주문해 읽을 여력이 없었다.

앞서 걸어간 사람의 발자취가 뒤에 오는 사람에게 주는 힘

그때 한 글쓰기 플랫폼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쓴 글을 발견했다. ‘Shortbus’라는 필명의 작가는 친족성폭력 피해에 대응하고 마음을 치유해 나간 과정, 그리고 성폭력에 관한 생각들을 연재하고 있었다.

▲ 자신의 성폭력 피해 이야기와 성폭력에 얽힌 생각들을 연재하는 작가 ‘Shortbus’ 브런치스토리 연재 목록 일부. 그의 브런치 페이지에서 ‘답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 ‘학자들의 조직에서 발생한 성폭력’, ‘소수자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3개의 매거진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이 칼럼에서 그의 글을 언급해도 될지 문의했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며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brunch.co.kr/@shortbus)


피해에 대해 들었던 감정들, 가족에게 성폭력 피해를 알리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기까지의 일들, 살아가며 겪는 여러 성폭력에 점차 적극적으로 맞서게 된 과정, 성폭력은 도처에 있기에 또다시 성폭력을 겪는다고 해도 괜찮다는 강한 마음까지. 글에는 순간마다의 심경과 사람들과 나눈 대화가 상세히 담겨 있었다. 어떤 글들은 너무 공감이 되어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는 위로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랐다. 자신도 다른 성폭력 생존자와의 대화 경험을 통해 성폭력에 대해 입을 다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전형적인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도 글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치 ‘나 길 걷다가 넘어진 적 있잖아’라든가 ‘기차에 지갑 두고 내린 적 있어’와 같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이나 잠깐의 불운처럼” 피해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고,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나도 지금의 기록을 남겨보면 어떨까.

하루하루를 견디며 보내는 상황에서, 지금의 이야기들을 글로 쓴다면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보를 찾고 상의를 해도 어쩐지 더해지기만 하는 답답함과 괴로움을 해소하고 싶었다.

나는 혼자만 보는 비공개 블로그에 매일 거르지 않은 마음을 휘갈겨 썼고, 이어서 글쓰기 플랫폼에도 내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쓴다’는 심정으로 쓰는 글이라 구성이랄 것도 없었고, 문장은 다듬지 못해서 부끄러울 만큼 거칠었다.

하지만 내게 앞서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 하나하나가 소중했듯이, 누군가는 그런 글에서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언뜻 ‘사소해 보이는’ 성폭력 피해로 고통받은 사람들,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온 피해자들, 치유할 기회 없이 오랫동안 성폭력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외로운 마음이 줄어들었다.

실제로 그랬다. 내 글을 읽고 댓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댓글에는 비슷한 경험에 대한 고백과, 글을 읽으며 감정이 식었다 격했다 했다는 감상 등이 길게 담겨 있었다. 댓글로 대화를 나누며, 성폭력 피해가 얼마나 많은 여성이 공유하는 아픔인지 새롭게 와닿았다. ‘치부라 생각해 말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어 치유가 되는 것 같다’는 한 독자의 말은 나에게도 따뜻한 치유가 되었다.

▲ ‘Shortbus’ 작가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수기와 상세한 성범죄 대응 매뉴얼을 담은 책 『허들을 넘는 여자들』(보라 외 9인 지음, 이야기모란단, 2022)에 ‘해라’라는 필명으로 참여했다. 내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결심을 댓글로 공유하니, 나를 응원해주며 자신을 포함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참여한 수기집을 선물로 보내주었고, 성폭력 생존자들의 치유에 도움이 되는 책도 추천해 주었다. 나와 다르면서도 닮은 생각과 감정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나간 여성들의 흔적은 내게 큰 용기가 되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응원을 받으며 내 브런치스토리에 적어나간 글들은 지금은 비공개로 보관함에 들어있지만, 지금의 〈해도 되는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력이 되었다. [사진 출처=민바람]

성폭력 생존자의 글쓰기

글쓰기는 성폭력 피해에 대응하고 트라우마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붙잡은 지푸라기였다. 성폭력 피해가 내게 고통이었던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며 내게 그 고통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힘이 누군가의 고통을 줄여주는 데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런 믿음은, 결과적으로 현재의 괴로움을 줄여주었다.

성폭력 생존자의 치유를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에서는 치유의 도구로서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권한다. 또한 글쓰기가 그 자체로 매우 도움이 되지만, 자신에게 큰소리로 읽어주면 자신이 쓴 글의 효과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고 안내한다. 나아가, 한 생존자가 생존자 집단에서 훈련의 일환으로 자신에게 쓴 편지를 소개하며, ‘내게 쓰는 감사편지’는 치유 과정에서 이룬 것들을 밝게 비춰볼 수 있는 쓰기 훈련이라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에 대응하거나 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곁에 있다면 무척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또는 아직 누군가에게 터놓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우선 글을 써보기를 조심스레 권하고 싶다.

영화 〈한공주〉에서 공주가 음악을 통해 스스로에게 숨 쉴 곳을 마련해 준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의지가 되어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낸 지푸라기 한 줌이 어쩌면 자신에게, 나아가 절실한 누군가에게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용기는 전염된다.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배웠다. 그게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 소개] 민바람.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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