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오기원 길’의 주인공 오웬 목사 [도로명 속 남도역사 인물]

1904년, 유진벨과 오웬 선교사가 양림산 자락에 광주 선교부를 만들고 첫 예배를 드리면서 광주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다. 따라서 양림동에는 '수피아홀', '오웬 기념각', '커티스메모리얼 홀', '윈스브로우 홀', '우일선 선교사 사택' 등 기독교 관련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양림동을 광주 근대 건축의 '보물창고' 혹은 '서양촌'으로도 부르는 이유다.

오기원 길은 펭귄 마을 입구인 양림동 오거리에서 방림신협 앞 사거리까지의 2차선 도로다. 양림동 오거리에서는 서서평 길과, 방림신협 앞 사거리에서는 정율성로와 만난다. 오기원 길 주변에는 기독간호대학교와 그를 기억하는 오웬 기념각, 양림동 펭귄 마을, 옛 숭일학교 터에 건립된 무등파크 맨션 등이 있다.
#목포 선교부에 부임
오기원 길의 주인공 오웬은(Clement Carrington Owen, 1867~1909)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친이 사망하자,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의 손에서 자란다.
조부의 도움으로 햄튼 시드니대학과 유진벨이 나온 버지니아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의학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시드니대학 뿐 아니라 신학교와 의과대학까지 졸업했으니, 당대 미국에서도 엘리트였다.
오웬은 189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897년 10월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에 임명된 후, 이듬해인 1898년 11월 남장로교 선교사 2진으로 한국에 입국한다. 오웬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유진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한다. 의사였던 오웬에 의해 전남 최초의 서양식 의료소인 목포진료소가 세워지면서, 목포와 전남 일대의 선교는 활기를 띤다.

#유진벨과 광주 선교부 개척
유진벨의 임시 사택에서 시작된 목포진료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사람들은 병 치료를 위해 진료소를 찾았지만, 치료를 받은 자와 가족은 특히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목포 경무청의 총순(현재의 경감)이던 김윤수였다. 그는 주조장을 운영하는 등 목포 사회에서는 유지였다. 그의 모친은 오웬을 찾아 손에 난 종기를 치료하였고, 그 인연이 계기가 되어 1900년 김윤수는 오웬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이후 그는 부인을 비롯하여 어머니와 장모까지 교회로 인도한다.
1902년, 집사로 임명된 김윤수는 1903년 목포교회당 신축공사 총감독을 맡았고, 프레스톤이 도착했을 때에는 그의 어학 선생이 된다.
1904년, 미국의 남장로교가 광주에 선교지부 설치를 결정하자, 선교사보다 먼저 광주에 도착하여 선교사들의 집을 짓는 등 광주 선교를 위한 터전을 마련한다. 그의 노력으로 유진벨 등의 임시 거처가 만들어지자, 유진벨과 오웬 선교사가 광주 양림산 자락에 터를 잡는다. 그리고 1904년 12월 25일 유진벨 집에서 광주 최초의 예배가 열린다. 광주 선교의 시작이었다.
12월 25일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후일 광주 최초의 장로·목사가 된 오방 최흥종도 있었다. 그는 김윤수의 권유로 예배에 참석하였고, 이후 김윤수의 도움으로 광주 경무청 순검이 되기도 했다. 1909년, 오웬이 급성 폐렴으로 사경을 헤매자 광주 제중원 원장 우월순(윌슨)은 목포 선교부의 내과 의사였던 포사이트에게 전보를 쳤고, 최흥종은 김윤수와 함께 포사이트를 마중 나간다.
그리고 최흥종은 포사이트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한센병 환자에게 입히고 말에 태우고 양림동으로 와 치료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최흥종이 봉선동 땅 천여 평을 내어 나환자 진료소를 짓고 평생 나 환자를 돌보는 삶을 산 이유다. 망치라 부르며 장바닥을 휘어잡았던 주먹 최흥종을 '무등산의 성자'로 이끈,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도 김윤수였다.

오웬은 이미 살핀 것처럼 1897년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98년 11월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발령받은 곳이 유진벨(배유지)이 깃발을 든 목포 선교부였다. 오웬은 목포 선교부에서 진료소를 설치한 후 의료와 선료 활동을 병행하면서, 광주 선교부의 기틀을 닦은 김윤수에게 세례를 주는 등 큰 성과를 거둔다.
1904년 오웬은 유진벨과 함께 광주선교부를 개척하기 위해 목포를 떠나 광주로 이동, 양림동에 광주 선교부를 설립한다. 그리고 광주읍성 북문 안쪽 위치(현 충장파출소)에 북문안 교회를 세운다. 광주 최초의 교회였다.
광주 선교부로 옮긴 오웬의 선교 지역은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었다. 진도, 완도, 해남 등 섬에도 들어갔다. 오웬의 순례 선교는 한 번 나가면 한 달씩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은 오웬이 순례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전남 일대의 교통은 매우 열악했다. 때로는 말을 타고, 때로는 배를 타고 이동했지만, 뚜벅뚜벅 걷는 경우도 많았다. 남도 땅 곳곳에 오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흑염소로 유명해진 완도 약산도에도 오웬 선교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약산면 관산리에 오웬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세워진 교회가 약산제일교회다. 교회 당회(堂會) 모임 때 작성된 "1904년 10월 15일 본도인 정만일씨가 전도인 노학구씨를 청하여 처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전파하다. 1905년 6월 8일 미국 선교사 오목사(오웬)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므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 4~5명이 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지라"라는 기록이 그 증거다.
1909년 3월, 오웬은 꽃샘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조사(助事, 목사 도움이) 배경수와 함께 집을 나선다. 오웬이 찾은 지역은 광주에서 280리 떨어진 장흥이었다. 그는 세례 문답 중 지친 몸을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진다. 평소 건강한 편이 아니었는데, 과로와 갑자기 불어닥친 꽃샘추위로 급성폐렴에 감염된 것이다.
장정을 동원하여 지게에 지고 광주에 도착했지만, 오웬의 상태를 확인한 제중원 원장 우월순은 목포선교부에 있던 내과 전문의였던 포사이트에게 전보를 쳐 도움을 요청한다. 안식년을 지내고 미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도 안 된 포사이트가 급히 광주에 달려왔지만, 오웬의 숨은 이미 멈춰 있었다. 42살의 너무도 짧은 인생이었다.
1909년 4월 6일, 오웬은 양림산 자락 정상부에 안장된다. 오웬의 묘비에는 몸돌에 한자로 '오목사(吳牧師)', 받침돌에는 영어로 'OWEN(오웬)'이라고 새긴다. 그의 묘비명이 '오목사'가 된 사연이 또 감동이다. 오웬이 한국에 와서 깜짝 놀란 것 중 하나가 양반은 이름이 있는데, 평민이나 천민은 이름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웬은 평민들과 친구가 되고자 자신의 '이름'과 '님'이라는 존칭을 지우고 그냥 '오목사'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죽어서도 '오목사'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의 묘비명이 '오목사'가 된 연유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오웬의 치료를 위해 목포 선교부 소속의 포사이트가 광주로 달려왔고, 길가에 엎드려져 있는 한센인(나환자)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양림산 가마터에 옮긴 후 정성을 다해 치료한다. 당시 그 한센인을 위해 오웬의 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한센인 여인에게 오웬의 침대까지 내어주며 치료를 돕는다.

#오웬을 기리는 건물, 오웬기념각
오웬이 세상을 뜬 이후, 1914년 양림동에는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리는 기념각이 건립된다. 오웬은 어린 시절 부친이 사망하자,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 컸다. 미국에서 손자의 슬픈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와 친지들은 1천 달러를 기증하였고, 오웬의 아내 조지아나 휘팅은 3천 달러를 내놓았다. 건물 입구에 'IN MEMORY OF WILLIAN L. AND CLEMENT C. OWEN(윌리엄 오웬과 클리멘트 오웬을 기념하여)'라는 문패가 붙은 연유다.
오웬 기념각은 회색 벽돌과 우진각 지붕으로 지어진 2층 건물로 평면이 4각형이다. 정면과 측면 입구의 장식은 이슬람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나며, 현관은 2층까지 뚫려 있다. 건립 당시는 남녀가 유별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남녀의 출입문이 달랐고,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 한가운데에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했다. 북측 문은 '숭일문', 서쪽 문은 '수피아문'으로 불린 연유다.
오웬 기념각은 북문안 교회를 남문 밖 금동으로 옮겨 짓는 동안 예배처였고, 1920년 광주 YMCA 창립 장소이기도 했다. 기독교 관련 집회는 물론이고 강연회, 음악회, 영화, 연극 등 각종 문화 행사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필례(후일 수피여학교 교장)의 음악 발표 장소였고, 1921년 5월 독립운동가 이강이 인솔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학생음악단이 사교춤과 탭댄스를 선보인 곳이었다.
광주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된 오웬 기념각은 '오기원 길'과 함께 선교사였던 오웬을 기억하는 흔적이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