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부분이라면 전체는 무엇인가 [김영민의 연재할 결심]

한국 사회는 계엄 시도를 전후해서 어떤 불법이 저질러졌는지 한창 따지는 중이다. 결국 유죄 여부와 범위가 결론이 날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형량이 정해질 것이다. 이것은 법적인 과제다. 정치인들이 제정신이라면 재발 방지를 위한 장치 마련에 부심할 것이다. 정치적 리더십에 이르는 과정을 재점검하여, 훌륭한 혹은 적어도 무난한 인물이 리더십을 쥘 수 있게끔 과정을 가다듬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제도의 과제다. 그렇다면 정치사의 과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정치적 수세 국면을 전환하고자 저 사달을 일으켰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그게 아니면 아내의 비리를 덮으려 무리했다고 상당수 사람들이 믿는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계엄 시도가 그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그러니까 이해할 만한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정치적 수세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나 가족 비리를 덮어보려는 것은, 바람직함 여부와 무관하게, 그 동기를 상상할 수는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있기에 어느 정도 과학적 이해가 가능하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바람직하다는 것은 별개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신인이 갑자기 엄청난 정치권력을 쥐게 되면서 감행한 미숙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미숙함이라는 설명을 통해,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퍼즐은 저와 같은 이해가 정작 윤석열 전 대통령 본인 입장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사실에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자신은 단지 정치적 수세를 벗어나려고 든 것도 아니고, 아내의 비리를 덮어보려 무리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것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기에,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탄핵과 특검, 야당 대표의 방탄으로 국정이 마비 상태”에 있기에, “헌정 질서 회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정치적 결단을 한 것이다. 그 결단 이후의 조치들이 불법으로 보여도 윤석열 전 대통령은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계엄을 통해 일상의 법치를 넘어서는 상태로 이행하려고 한 것이니까. 그 이행이 합당하다면, 나머지 행위들은 상당 부분 용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관건은 그 초법적인 상태로 이행이 타당했는지 여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말을 어디까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진심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유죄를 피하거나 형량을 줄이기 위해 변명에 급급하는 것일까. 문제는 이에 대해 확정적으로 알 방법이 현재 없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사실에 있다. 아무도 윤석열 전 대통령의 뇌세포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는 그의 동기를 추론할 수 있을 뿐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윤석열 전 대통령 자신마저 계엄 시도의 동기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질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옛 기억을 덧칠하고 윤색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진솔한(?)” 회고록을 남겨도 마찬가지다. 일기에조차 거짓말을 쓰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 진실성을 끝내 명백히 알 수는 없다. 어떤 법적 판단이 내려지든, 그의 심리적 전개 과정은 영구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계엄을 전후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심리에 깊이 접근할 방법은 없어도, 그가 남긴 말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의 심리가 어떤 것이었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동원했던 언술들은 존재한다. 예컨대 “헌정 질서 회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와 같은 말은 그의 심리가 무엇이었든,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한 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남들도 납득시키려 했다고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저는 이에 당당히 맞설 것입니다. 국민과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하기 어렵다.
영구 미제로 남을 윤석열의 심리
여기서 “헌정 질서 회복” 운운하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계엄 시도 자체가 합헌적이었다는, 적어도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상황보다는 합헌적인 조치였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계엄 시도를 전후한 일견 불법적 행위들은 계엄이 합헌인 한, 그 행위들도 자연스레 합법적이 된다는 뜻이다. 계엄이란 일상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일련의 조처들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니까. 계엄이 타당했다면, 그 이후의 비상식적 조치도 상당 부분 용인된다. 그래서 윤석열 전 대통령은 말한 것이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권 행사는 사면권 행사, 외교권 행사와 같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운운하는 것 역시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이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국가임을 천명한다. 대한민국은 단지 생존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군집해서 살아가는 집단이거나,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임을 천명한다.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 않던 사람은 이 부분에서 뜨악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치가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가치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것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이 부분에서 뜨악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엄 시도 직전의 상황이 과연 새삼 “회복”을 필요로 할 정도로 헌정 질서가 파괴된 상태였던가, 그리고 새삼 “수호”가 필요할 정도로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태였던가. 이 질문과 대답이 핵심이다. 한국갤럽이 2024년 12월10~12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2월1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비상계엄을 ‘내란에 해당하는 반헌법적 쿠데타’로 보는 응답이 70%대에 이르며, 계엄 조치를 합법적 권한 행사로 보는 견해는 소수에 그쳤다. ‘뜬금없는 계엄선포 “미치지 않고서야”’ “선포 사유도 뜬금없다” “느닷없는 한밤중 선포” “뜬금없어서 더 무섭다” 같은 당시 기사 제목이나 댓글 반응들이 보여주듯이 계엄 시도는 국민 대다수의 생각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처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국민 다수의 생각과 배치된다면, 그의 현실 인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물론 그가 보여준 현실 인식 자체도 하나의 연극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연극인지, 아니면 그의 생각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일단 헌정 질서와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였다는 말이 그의 진심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현실 인식을 갖지 않았다면, 정치적 자해에 가까운 이 사건의 발발을 이해하기 쉽지 않으므로.
자, 과연 그의 현실 인식이 어디서 온 것일까. 이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국민 다수의 현실 인식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일종의 광인 혹은 혹은 ‘돌아이’로 보는 것이다. 알코올에 대한 탐닉, 어린 시절 가정환경, 과도해 보이는 집무실 환경 등 항간의 소문 혹은 논란은 이러한 ‘돌아이’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런데 그는 한국 사회의 엘리트였으며, 매우 오랫동안 공직을 수행했고, 한때는 정의로운 검사의 상징이었으며, 결국 민주당 정권에 의해 발탁된 사람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가 정권을 잡자,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입각하거나 그의 정권에 협조했다. 따라서 그를 보기 드문 ‘돌아이’로 치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는 적어도 고립된 ‘돌아이’는 아니다. 그와 소통 가능했던 한국 사회라는 더 큰 전체가 있고, 그는 그 전체의 일부다. 그가 돌아이라면, 그 전체도 ‘돌아이’가 아닐까. 그 전체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과연 그의 현실 인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혹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그의 표면적 언술이나 행동에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잠재의식 혹은 의식의 수면 밑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의 표면적 의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의 심층(그런 게 있다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가 평소에 가졌던 믿음이나, 무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던 충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과학을 넘어서는 이해가 필요한 셈이다. 마치 신흥 종교 현상을 이해하는 자세로 이 케이스를 들여다보아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흥미로운 가정이지만, 이런 접근은 엄밀성을 추구해온 기존 사회과학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날벼락 같은 청구서, 무엇 때문일까
과연 그의 현실 인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또 하나의 대답은, 그를 과거의 망령으로 보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과거에 만연했던 특정 정치세력의 연장태로서 보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아직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은 군사독재나 극우의 후계로 보는 관점이 그 예이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과거의 망령을 더욱더 철저히 뿌리 뽑을 때 이와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으며, 그것을 뿌리 뽑을 이들은 다름 아닌 민주화 세력이 된다. 그러나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학창 시절 모의재판 때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선고를 했으며, 한때 정의로운 검사의 상징이었으며, 민주당을 통해 정치적 스타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는 민주화 세력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윤석열 전 대통령은 단지 극우의 일부라기보다는 이른바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더 큰 전체의 일부다.

요컨대 윤석열 전 대통령은 무덤에서 깨어난 과거의 망령이거나, 어느 날 한국 사회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아니다. 그는 현재 한국의 일부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 한국 근현대사라는 전체의 일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때 독재에 반대했던 인물이었음을, 그리고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발탁되었음을 상기한다면, 독재 대 반독재, 혹은 좌익 대 우익, 혹은 보수 대 진보의 역사를 통해 계엄 시도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일상적 정치에 군대라는 조직화된 폭력(organized violence)을 동원하려 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그것은 일종의 조직화된 무능(organized incompetence)이 아니었을까. 과거 한국의 계엄 상황을 기억하는 세대는 이번 계엄 시도가 상대적으로 무능하고 나이브하며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것은 어떤 가공할 정도로 유능한 악의 발현이라기보다 한심할 정도의 무능이 삐져나온 것처럼 보였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가열찬 정치적 투쟁만큼이나 이 무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성실하게 가꾸어야 할 그 어떤 것을 소홀히 한 결과, 이런 대규모의 무능이 뛰쳐나온 것이 아닐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공짜 점심은 없다고 말했다. 이 무리하고도 무능한 계엄 시도가 날벼락처럼 날아온 청구서라면, 공짜인 양 먹어치운 점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정치사, 혹은 한국 근현대사의 과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ditor@is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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