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조달러 만지던 트레이더는 왜 은행을 떠났나 [.txt]

최재봉 기자 2026. 2. 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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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베팅해 큰돈 번 외환 트레이더
성공의 정점에서 회의와 죄책감 느껴
일 그만두고 자산 불평등에 맞선 활동가로
영국의 경제 유튜버이자 활동가인 게리 스티븐슨이 쓴 ‘트레이딩 게임’은 외환 트레이더로 백만장자가 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산 불평등과 부의 악순환 구조를 고발한 책이다. 사진은 투자와 거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회사원들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런던 신도시의 높은 건물들이 올려다보이는 골목에서 축구를 하고 친구들에게 과자를 팔거나 신문 배달을 해서 용돈을 벌던 소년은 언젠가 그 불빛 속에서 일하는 부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세계 굴지의 은행 외환 거래직으로 입사해 불과 몇년 만에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의 정점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와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결국 은행을 나와 불평등을 해소하는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번역본 기준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 ‘트레이딩 게임’의 얼개를 몇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영국의 경제 전문 유튜버이자 활동가 게리 스티븐슨이 쓴 이 책은 그가 스물두살이던 2008년 씨티은행의 트레이더(거래자)로 입사해 하루에 거의 1조달러를 다룰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27살 나이에 돌연 퇴사하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짜였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개츠비를 닮은 성공담과 그 성공의 이면에 대한 반성이라는 상반되는 요소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전반부의 성공담은 흔히 접하기 어려운 외환 트레이더들의 직업 세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흥미진진하고, 회의와 결단을 다룬 후반부는 불평등을 자양분 삼는 경제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과 퇴사에 이르기까지 지은이의 방황과 고뇌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려서부터 수학에 남달리 뛰어났던 게리는 상위 5퍼센트의 학생이 다니는 특수고에서 마약 판매로 퇴학당한 뒤 일반고를 거쳐 엘리트 학교인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니던 중 씨티은행이 주관하는 트레이딩 게임에서 우승하는데, 그것이 “비교적 간단한 수학 게임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우승자의 특전으로 그는 인턴을 거쳐 씨티은행의 외환 거래장인 트레이딩 플로어에 입성한다. ‘단기 이자율 트레이딩’(STIRT) 데스크에 속해 외환을 다루게 된 그가 하는 일은 외국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익을 챙기는 것인데, 원화를 사고 외화를 파는 공항의 환전 창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외환 트레이더는 서로 다른 통화를 사고파는 것뿐만 아니라 “장기로 달러를 빌려주고 매일 달러를 다시 빌려”오는 방식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남긴다. 뛰어난 수학 머리에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라는 ‘호재’가 겹쳐서 그는 첫해에 1천만달러를 번 첫 트레이더가 되고 2년 뒤에는 씨티은행의 전 세계 트레이더를 통틀어 가장 높은 이익률을 거두기에 이른다.

문제는 그의 성공이 세계 경제의 위기와 연동되어 있다는 점.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다른 트레이더들이 경기 회복을 예측했을 때 그는 위축과 위기 쪽에 돈을 걸었고, 결국 그가 이겼다. 이번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핵발전소 사고가 그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번 돈 1100만달러를 지진 사망 및 실종자 수 2만으로 나누어서 “사망자 1인당 550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라 계산할 때 자신의 직업에 대한 그의 회의는 싹을 틔운 셈이다.

그가 경기 회복이 아니라 경제 위기에 판돈을 걸게 된 더 근본적인 까닭은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고 악화되어 결국 경제를 지배하고 죽이고 있”다는 판단에 있었다. 가난한 이들은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다가 결국 마지막 자산인 집을 파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반면, 자산가들은 자신이 가진 돈을 소비에 지출하지 않고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을 늘리는 쪽으로 돌림으로써 경기 회복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부익부 빈익빈의 질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게 게리가 보는 지금의 경제 상황이다. 자신이 그런 그릇된 질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

트레이딩 게임 l 게리 스티븐슨 지음, 강인선 옮김, 사이드웨이, 2만5000원

아버지의 20년 수입을 1년치 성과급으로 챙겼던 그가 퇴직을 말리는 은행과 법적 다툼을 불사하면서까지 트레이더 자리를 박차고 나온 배경에는 이런 불편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도쿄 지사에 근무하는 동안 퇴직 절차를 밟았던 그는 “어쩌면 내가 이길 수 없는 게임, 부의 불평등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고 책의 마지막 장에 적었다. 퇴직 뒤 그는 유튜브와 방송 출연, 매체 기고 등을 통해 자산 불평등 구조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이들에게 직접 세금을 매기는 ‘자산세’를 부과하는 것만이 악순환을 막을 방법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완전히 미친 사람들”이라 표현되는 트레이더들의 기벽과 기행, 트레이더들의 거래를 중개하는 브로커(중개인)들의 접대 문화, 동료의 수익을 몰래 빼돌리거나 동료에게 자신의 손실을 떠넘기는 정글 같은 문화 등 트레이더 세계의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는 책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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