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기차 버블의 나비효과 [천조국 리포트]
전기차 점유율은 여전히 10%대
'유연함'이 가른 '현대차 vs K-배터리' 미국 상황
"美 BESS 시장은 기회지만 경쟁력 시험대"
(뉴욕=머니투데이방송) 염현석 특파원= 2026년 미국에 진출한 자동차 기업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단순한 전기차 판매 부진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전기차 전환이라는 단 하나의 확신을 전제로 자본이 얼마나 빠르게 한 방향으로 쏠렸는지, 그리고 그 확신이 흔들릴 때 산업 전체에 어떤 후폭풍이 발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 이후 미국 전기차 산업에는 '전기차 전환'이라는 분명한 키워드가 존재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충격 속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고, 팬데믹 이후 기후위기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서 전기차로 빠르게 전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산업 전반을 지배했다. 이 같은 확신 속에 2020년 이후 미국 전기차 산업에 투입된 누적 투자금은 2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문제는 이 막대한 자본이 캘리포니아나 뉴욕 같은 전통적인 친환경 지역이 아니라, 조지아·테네시·켄터키·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이른바 ‘레드 스테이트’에 집중됐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는 전기차 정책에 비판적인 지역이 아이러니하게도 전기차 공장의 중심지가 됐다.
이유는 분명하다. 비노조 노동시장, 낮은 인건비, 그리고 공격적인 세제 혜택이다.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이념보다 일자리와 세수가 우선이었다. 완성차와 배터리 기업들도 계산은 같았다.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보조금과 인센티브를 놓친다는 조급함이 시장을 지배했다.
◆전기차 점유율은 여전히 10%대
문제는 이 투자가 실제 수요보다 훨씬 앞서갔다는 점이다. 2021~2022년 자동차 업계는 집단적 확신 상태에 가까웠다. 당시 '2030년이면 전기차가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은 가정이 아니라 전제로 받아들여졌다.
대규모 투자는 이 같은 확신을 기반으로 이뤄졌고, 공장은 수요가 형성되기 전에 먼저 지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미국 내 전기차 판매 비중은 가장 높았을 때도 15% 수준에 머물렀다. 그것도 연방정부의 7500달러 세액공제 종료를 앞둔 ‘막차 수요’의 효과였다. 보조금이 끝나자 판매는 즉각 둔화됐다.
미국에서 전기차 전환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유는 명확했다. 소비자들은 여전히 가격, 충전 인프라, 사용 편의성 측면에서 전기차 구매를 망설였다. 하이브리드 차량만으로도 충분히 연비와 친환경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 확산됐다. 반면 공장은 전기차 비중 30~50%를 전제로 지어졌다. 이 괴리가 바로 미국 남부 전기차 버블의 핵심 원인이다.
여기에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리스크가 더해지면서 버블은 더욱 부각됐다. 전기차 공장은 투자 결정부터 가동까지 2~3년, 투자 회수까지는 10년 이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책은 정권 교체와 함께 빠르게 바뀌었다. 보조금은 축소됐고, 배출 규제 완화 논의가 동시에 진행됐다.
◆美 전기차 관련 시설, 좌초자산으로 나락
이 상황에서 미국 자동차 업계의 핵심 키워드는 ‘좌초자산’이다. 이미 지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공장과 설비에서 손실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가 생존의 문제로 떠올랐다. 포드는 전기차 공장을 가솔린 트럭 생산으로 전환하며 수백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인정했고,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잇따라 대규모 손상차손을 기록하고 있다.
이 와중에 상대적으로 조용히 이번 국면을 넘기고 있는 기업이 있다. 바로 현대차다. 조지아 메타플랜트는 전기차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구조적으로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 차량을 함께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전기차 수요가 둔화되자 생산 믹스는 빠르게 조정됐고, 현재는 하이브리드 비중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전기차가 안 팔리면 하이브리드를 만들고, 정책이 바뀌거나 전기차 수요가 다시 늘면 차종을 전환할 수 있다. 설비 구축 단계에서 확보한 이 유연성 덕분에 공장은 좌초자산이 아니라 전환자산으로 남았다. 결국 미국 전기차 버블 국면에서 현대차가 입은 상처는 수요 둔화가 아니라 전환 비용에 그쳤다. 이 점이 현대차와 다른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을 가른 결정적 차이였다.
◆"美 BESS 시장, K-배터리에 기회지만 경쟁력 시험대"
반면 배터리 산업은 상황이 다르다. 전기차 둔화는 미국에 야심차게 진출한 한국 배터리 업체들에 훨씬 직접적인 충격으로 작용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의 미국 투자는 대부분 전기차 수요 확대를 전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완성차 업체들이 하이브리드로 이동하면서 전기차 전용 배터리 수요는 분명히 둔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떠오른 대안이 BESS, 에너지 저장 장치다. 미국의 BESS 누적 설치 용량은 2023년 기준 20~25GW 수준이지만, 2030년에는 120~150GW로 확대될 전망이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 재생에너지 확대, 전력망 안정화 요구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다만 BESS는 전기차 배터리와 성격이 다르다. 에너지 밀도보다 안정성, 수명, 그리고 원가 경쟁력이 훨씬 중요하다. 이 때문에 BESS 시장에서는 LFP 배터리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에 기회이자 부담이다. 전기차 이후의 대안 시장이지만, 동시에 중국 업체들과의 원가 경쟁이라는 새로운 시험대이기도 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세 업체 가운데 BESS 전환 준비가 가장 빠른 곳으로 평가된다. 삼성SDI는 고신뢰·고부가 영역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반면 SK온은 전기차 의존도가 높아 전환 속도가 생존의 관건이 되고 있다. 배터리 산업은 지금 전환이 아니라 재정의를 요구받고 있다.
미국 남부 전기차 버블은 전기차 기술 자체의 실패가 아니다. 속도와 정책, 그리고 자본 배분이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다. 이제 승부의 기준은 분명해졌다. 전기차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유연한 구조를 만들었는지, 누가 다음 수요와 정책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는지가 미국 시장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염현석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