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 아닌 ‘겪음’으로 이룬 채상소고춤 [진옥섭 풍류로드]

한겨레 2026. 2. 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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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_김운태 전(傳) ①
김운태류 채상소고춤은 이 땅을 떠도는 유랑을 통해 호남과 영남, 웃다리(경기와 충청)의 춤가락을 엮은 장쾌한 춤이다. 추임새가 터지자 허공 중천에 솟아올라 자반뒤집기를 돌고 있다. 구기훈 사진작가 제공

상모를 돌리지 않고 뒤로 젖힐 때, 긴 한지 띠가 바람에 날린다. 한지의 나부끼는 소리가 들릴 때,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되뇌게 한다. 이윽고 발걸음을 시작하면, 장단이 “바스락” 3분박으로 밟힌다. 그 묵직한 걸음에 또다시 시가 터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쯤에서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 떠오르는 건, 이제 ‘낙엽사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발로 소고를 톡 찬 후, 공중에서 한바퀴 돌고 낙엽처럼 떨어진다. 미동 속의 격동, 춤에서 이만한 순식간이 없다.

지난달 15일부터 서울 돈화문국악당에서 열린 ‘김운태 전(傳)’에서 김운태가 춘 채상소고춤의 앞 대목 풍경이다. 선전 문구로 ‘마지막 유랑의 춤꾼’이라고 했다.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연일 관객의 추임새가 터졌다. 6회 공연이 늘어나, 8회 공연이 되었다. 김운태는 이 풍류로드에 몇차례 단역으로 출연했었다. 이제 이 판에서도 완판 풍류를 펼칠 때가 된 것이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상모 쓴 호랑이를 보자. 호돌이가 쓴 모자가 전립이고, 긴 리본이 ‘초리’라는 한지 띠다. 그리고 생략되었지만, ‘물채’라는 노끈으로 꼰 긴 막대가 전립과 초리를 연결한다. 채상소고춤은 이 물채와 초리를 돌리며 소고를 치는 기예적인 춤이다. 아울러 공중에서 도는 곡예적인 동작도 많아 언제나 박수가 가득 찬다. 채상소고를 언제 누가 고안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남사당패에서 가장 발달한 것으로 보아 유랑패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측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껏 놀이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고깔을 쓴 고깔소고는 멋스런 완급으로 일찍부터 춤이었지만, 채상소고는 기예에 기대왔기에 그저 놀이였다. 이 놀이에 정중동을 부여해 춤이 되게 한 혁명적인 춤꾼이 김운태(1963년생)다.

고인이 된 정범태 선생이 말했다. “상모 나고, 김운태 났다.” 낮에는 정치를 찍는 사진기자, 밤에는 춤을 찍는 풍류인으로 ‘한국명무전’이란 춤의 법전을 펴낸 분의 말이다. 안숙선 명창이 말했다. “춤이라면, 운태처럼 탁! 하니 너울거려야지.” 여성농악단의 소고꾼으로 시작해, 우리 시대 최고의 명창으로 우뚝 선 분의 말이다.

김운태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떠도는 가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김칠선(1926~1979)은 일본무술협회 공인 5단의 주먹에 칼놀림이 빨라 ‘호남 오토바이’로 불렸다. 해방 후 아우들이 좌익에 들자 더불어 지리산에 올랐다. 빨치산 활동 뒤 옥고를 치렀고, ‘주먹세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광목 포장과 말뚝 기둥을 샀다. 큰누나 김정희는 운장산에 들어가 아버지의 무예를 전수했다. 하산 때는 태권도, 검도, 유도, 도합 10단으로 온몸이 흉기였다. 김홍이란 이름으로 여자프로레슬링 전국순회대회에 참가하여 단번에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대적할 선수가 없어 은퇴했고, 아버지의 포장극장 앞에서 어깨 노릇을 했다. 셋째 누나 김정숙은 중학교 교복을 자랑하러 갔다가, 휘청거리는 가업을 살리려 장구를 맸다.

김운태는 여섯살 무렵 여성농악단에서 여장한 소년으로 바람처럼 돌았다. 허리춤에 구경꾼들이 꼽은 지폐가 가득했다. 구슬과 딱지를 몰랐고 나이가 차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호남여성농악단의 소년 신동이요, 흥행의 핵이었다. 순회를 할 수 없는 장마철에는 배고픔이 찾아왔다. 또 겨울엔 ‘도야’라 하여 동물의 동면처럼 최소한의 음식으로 봄까지 견뎌야 했다. 국수를 퍼지게 삶아 헹구지 않고 소금 뿌려 먹었고, 밥을 해도 찬이 없어 식용유를 넣고 비볐다. 그 주린 배를 쥐고 훈련을 거듭했다.

봄이 오면 전남 구례의 곡우제를 시작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경남 진해 군항제, 전북 남원 춘향제, 강원 강릉 단오제, 충남 부여 백제예술제, 경남 밀양 아랑제, 경북 경주 신라문화제, 경남 진주 개천예술제를 떠돌았다. 손님이 많으면 밥상이 달라졌다. 하루 5회 이상 공연할 때면, 오랜만에 비계가 뜬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다. 소년 신동이라 매회 빠짐없이 공중을 돌아야 했기에, 큰 대야에 소금과 설탕을 타 놓고 마셔 탈수를 방지했다. 때로는 너무 어지러워 아까운 고깃국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도 10회 공연이 가능한 신라문화제 같은 축제를 기다렸다. 흥행이 잘되면 몇 사람에 한마리 꼴로 삶은 닭을 먹을 수 있었다.

흥행에 성공하면 불청객이 먼저 왔다. 아버지의 명성으로 건달들은 건들지 않았지만, 읍내 유지의 자제들로 구성된 족보 없는 패거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술값을 안 준다고, 공짜로 안 넣어준다고, 면도칼로 포장을 찢었다. 큰누나가 수습하면, 남자랍시고 한사코 덤볐다. 결국 수도치기, 매치기 등을 맛보고 업혀 가야 끝이 났다. 경찰서에 고소가 들어가면, 큰누나는 치마를 입고 출두했다. 그때마다 소년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따라가 훈방을 유도했다.

‘가도 가도 황톳길’을 트럭에 올라 떠돌았다. 포장극장에 설 자리를 잃은 형들이 찾아왔다. 이광수, 김용배, 이부산, 조갑용 같은 명인이었다. 찬조 출연하는 그들의 동작을 살피고 있으면, 이미 춤이 옮겨지고 있었다. 그렇게 춤은 ‘배움’이 아니라 ‘겪음’을 통해 몸에 새겨졌다. 모두 일찍 떠났지만, 스승이자 의형제인 이광수는 진득했다. 묵묵히 잡일을 했고, 공연 때는 사회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훗날 김덕수와 사물놀이를 만들었고, 청년 김운태를 부르게 된다.

김운태는 할리 데이비드슨의 굉음과 함께 춤판에 온다. 어린 시절부터 트럭 엔진의 울림과 함께 황톳길을 떠돈 때문이리라. 거친 엔진 위에서 춤을 구상하는 것이 그만의 무법이다. 이진환 사진작가 제공

돈화문국악당 앞마당에 할리 데이비드슨 오토바이가 전시되어 있다. 여느 때라면 김운태는 오토바이의 굉음과 함께 춤판에 온다. 엔진의 울림에는 규칙 있는 연소와 불규칙한 노킹이 있다. 이 규칙과 불규칙 속을 노니는 게 그의 춤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도 페달을 밟듯, 뒤꿈치를 들고 어디론가 떠날 태세로 춤춘다. 그러나, 그러든가 말든가, 길 미끄러우니 제발 세워두라 한 것이다. 한파라 마지막 날까지 사고 없이 출연하는 게 우선이었다.

‘김운태 전’, 가슴 벅찬 말이지만, 그에겐 버거운 판이다. 채상소고는 서른이 환갑인데, 본 나이로 환갑을 이미 넘겼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새 옷이 두려운 춤꾼이 되었다. 천의 무게가 버겁고, 촘촘한 올이 숨을 막는 것이다. 올이 가늘어져 무게가 줄어든 낡은 옷이라야 숨통이 트인다. 게다가 레퍼토리가 소리굿, 비나리, 판소리, 판굿, 설장고, 채상소고춤이다. 판굿을 빼고 전부 나가 반주나 소리를 한다. 마지막 허리가 끊어질 무렵 상모를 돌려야 하니, 무대가 아니라 묘지다. 그러나 어쨌건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버텨야 한다.

비나리는 농악패의 상쇠가 정초에 가가호호를 돌며 일년 열두달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이는 소리이다. ‘김운태 전(傳)’에서 춤꾼 김운태가 직접 꽹과리를 잡고 관객들의 복을 빌었다. 구기훈 사진작가 제공

‘김운태 전’이라 했으니,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영상에 담아야 했다. 그래서 공연 중간에 상영해 그에게 쉴 시간을 주어야 했다. 그간 가깝고 먼 곳에서 함께한 내가 대담자가 되었다. 나는 그의 채상소고춤을 처음 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로 인해 나도 고초를 겪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에 신이 내려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세 단락으로 나눈 영상은 시간이 넘쳐, 두 단락을 공연 전에 상영해야 했다.

1994년 4월, 나는 서울 대학로 하늘땅소극장에서 노름마치 사물놀이 장기공연을 봤다. 이광수의 꽹과리, 장사익의 태평소, 김운태의 장구, 한승석의 꽹과리, 김주홍의 북이 함께했다. 사물놀이가 끝나자, 관객들이 “소고춤”을 아우성쳤다. 그러자 김운태가 장구를 놓고 상모를 썼다. 당연지사 상모를 팽팽 돌리고, 자반뒤집기를 돌 것이었다. 그러나 춤이 아니라 우선 멈춤이었다. 그저 연꼬리 같은 하얀 띠를 늘어뜨린 채 장단에 적시고 있었다. 대개 상모가 돌면 자전이나 공전같이 일정한 순서로 돌았다. 그런데 때가 되자 저절로 돌다가 기습처럼 원하는 곳에 던졌다. 예측불허의 폭격을 마친 하얀 띠가 떨어질 때, 분명 한마리의 흰 나비였다.

1995년 12월, 김운태는 대학로에서 서울두레극장을 개관했다. 포장극장을 접은 지 20여년 만에 다시 가업을 재개한 것이다. 비 새는 포장극장의 소년이 비 안 새는 극장을 꿈꾼 결과였다. 흥행사에 다시 없는 일이라, 나도 기획자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신파조로 “아! 차라리 비가 새고 말지, 극장은 돈이 줄줄 새는 곳이었던 것이었다.” 그 뒷이야기는 다음에 잇는다.

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전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이다. ‘사서삼담’, 4일은 서울 3일은 담양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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