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교과서?...더 캐내야 할 진실 위해 본질연구 절실”
허호준 “실증연구 강화돼야” 김동윤 “단선반대 운동 중요”

2003년 정부가 조사·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정부보고서)'는 4.3이 현재 위상을 갖게 되는 데 큰 동력이 됐다. 그러나 정부보고서를 마치 교과서처럼 여기고 연구가 진전되지 못한다면, 4.3 연구뿐만 아니라 여러 4.3 기억 활동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1차 사료에 기반한 '실증적 연구'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조언이 제기됐다.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은 5일부터 6일까지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제5회 학술대회 '4.3연구 80주년을 향해·너머'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2028년 4.3 80주년을 준비하는 자리로, 이틀 동안 다루는 주제가 무려 28개에 달할 만큼 규모와 깊이를 자랑한다.

허호준 '기억과 해석을 넘어'
허호준 연구원은 '기억과 해석을 넘어-4.3 본질 연구의 필요성과 방향'을 발표했다. 허호준 연구원은 정부보고서가 미처 담지 못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본질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보고서 발간 이후 22년의 연구 흐름을 보면, 4.3 연구는 '사건 이후'를 다루는 '사후 연구'(Post 4.3 Studies)에 집중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정부보고서가 제시한 서술을 사실상 '기준'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넘어선 본질 규명 시도는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고 한계를 짚었다.
또한 "1948년 4월 3일 무장대는 '미제는 즉시 물러가라'는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제주도민에 보내는 호소문에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봉기했다고 나와있지만, 정작 4.3 시기 무장대가 미군 시설이나 미군을 공격한 사례는 없다. 미군 정보보고나 외교문서에서 '대량 학살', 또는 '집단학살'이라고 표현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제주도 상황을 보고했음에도 왜 실제 이를 막기 위한 개입은 없었는지 여전히 해명되지 않았다"고 예를 들었다.
허호준 연구원은 "정부보고서는 피해 실태에 방점을 둔 만큼, 사건의 구조나 행위자 분석을 심층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보고서는 연구자들에게 과제를 안겨줬다고 할 수 있다"며 "사후 연구의 토대가 돼야 할 본질 연구는 아직도 여러 부분이 비어있다"고 지적했다.

허호준 연구원은 "정부보고서를 통해 이미 진상이 충분히 밝혀졌다는 인식, 정부보고서를 넘어서는 해석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사료 발굴의 어려움, 본질 연구의 범위와 방법론 설정의 난점, 사료 발굴의 노동 강도에 비해 연구 성과가 쉽게 보이자 않는다는 부담" 등이 본질 연구의 정체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허호준 연구원은 실증 연구에 대해 "1차 사료에 기반한 실증적 연구"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측 문서를 포함한 문서들 속에 담긴 4.3의 편린을 찾아 이를 정교하게 꿰맞추고, 교차 분석함으로써 사건의 전체적 실체를 복원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4.3 경험자들의 구술 증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온 숱한 증언을 해체하고 조합해 증언의 신빙성과 문서의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제주도인민유격대 사령관과의 만남은 '4.28 평화협상'이 아닌 '4.30 평화협상' ▲협상 결렬은 '오라리 사건' 때문이 아닌 미군정 내부의 전략적 판단과 더 밀접하게 연관 ▲4.3의 최종 국면에서 최후의 무장대를 추격·섬멸했던 경찰의 작전은 제주도경찰국의 독자 결정이 아닌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략 구도 등이 사료 발굴을 통해 새롭게 확인된 내용임을 꼽았다.
무엇보다 "4.3연구는 '사후 연구'와 '본질 연구'라는 투 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탄탄한 사실 기반 위에 있을 때 문학·예술 연구는 더 강력한 서사적 힘을 가질 수 있고, 교육·기념·치유 연구는 올바른 기억을 구성할 수 있다"고 본질 연구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본질 연구를 위한 과제로 ▲국내외 1차 사료의 발굴을 통한 사료 기반 실증 연구 강화 ▲동시대 사건과 비교 분석하는 비교 연구의 확장 ▲연구자 공동체의 협력체계를 꼽았다.
김동윤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 연구를 위해'
김동윤 교수는 '제주4.3'이 지닌 프레임(틀)을 깨는 전환적 접근을 제시했다. 바로 1947년 3.1절 기념행사부터 1948년 5.10 단선반대운동과 8월 정부수립까지 과정을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으로 명명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김동윤 교수는 "기왕의 연구에서는 이처럼 4.3 봉기에 방점을 찍음에 따라 그 항쟁 주체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라는, 즉 제주 남로당이 이끌고 제주 도민들이 거기에 호응한 항쟁이라는 관점으로 수렴될 수 밖에 없었다"며 "이러한 '항쟁주체=(제주)남로당' 프레임은 애초에 반공을 내세운 국가권력에 의해 짜인 것이기도 하거니와, 남로당 측에서도 자신들의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 그런 프레임에 동조한 결과이기에 깨뜨려야 마땅하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은 김동윤 교수와 김재용 교수(원광대 국어국문학과)와 함께 발간한 저서 '4.3항쟁과 탈식민화의 문학'에도 실려 있다.
김동윤 교수는 해방 이후 좌익도 우익도 아닌 중도파로 힘쓴 김규식, 여운형 사례를 들며 "항쟁의 주체를 왜 제주 남로당에서만 찾는가. 당시 제주에는 좌와 우만 있었겠는가. 이념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분단된 정부보다 통일된 자주정부의 수립을 염원한 이들의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김동윤 교수는 "제주의 2.7구국투쟁에 대한 남로당 중앙의 비판과 제주 남로당 청년 간부들의 자성이 단독선거 반대 열기와 결합하면서 4.3 봉기로 이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4.3 무장투쟁은 '1.22 검거사건'의 여파로 궁지에 몰렸던 제주 남로당이 뒤늦게 일으킨 2.7 구국투쟁의 변형된 양상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는 말"이라고 4.3봉기를 바라봤다.
또한 "그렇다면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무의미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 의미는 축소될 수 밖에 없고, 반면에 5.10 단선을 분쇄했다는 통일독립 항쟁의 의미가 더욱 부각돼야 마땅하다는 것"이라며 "일제 말기 상황에서 이어지는 해방기 제주도민의 상황, 특히 1947년 3.1절 기념식 집회로 폭발된 제주도민의 거대한 움직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것이 남북협상운동을 만나면서 5.10 단선 반대 투쟁으로 꽃피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이라는 판단"이라고 4.3 봉기 이전에 벌어진 활동을 주목했다.

김동윤 교수는 1947년 3.1절 기념행사부터 1948년 5.10 단선 반대운동을 거쳐,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까지 1년 반 동안을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으로 정의했다.
특히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은 '미군정 탄압시기'(1947.03.01.~1948.08.)와 병행하는 것이며, 정부수립 이후인 '본격적 국가폭력 시기'(1948.08.~1954.09.21.)와는 겹치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한 '반란'이란 공박은 아예 성립될 수 없게 된다"며 "남로당 중심의 봉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관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비남로당계 도민들에 의한 통일독립 항쟁임에 그 의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양조훈·양경인
양조훈 고문은 4.3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성격으로 ▲부당한 탄압에 대한 항쟁 ▲분단 반대의 통일운동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을 꼽으며, "제주4.3의 정명은 '4.3항쟁'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양경인 작가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일명 '해방공간'에서 제주여성운동에 매진한 제주 여성들을 살폈다.
양경인 작가는 "미군정의 좌익과 중도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면서 해방 공간에서 구습 타파와 계급 평등사상을 기치로 출발한 제주여성운동은 3.1사건과 4.3봉기를 거치며 반제 통일운동으로 나갔으나, 4.3전반에 대한 탄압과 대학살의 광풍에서 좌절됐다"며 "그후 제주여성운동은 친미적이며 반공적인 여성 운동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제주여성운동도 대한부인회와 같은 관변단체 중심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4.3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구술 작업을 강조하며 "4.3 당시 기억이 여성의 삶에 어떻게 내재화됐나를 이해하기 위해 1세대와 2세대를 비교 분석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개개인이 겪은 4.3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려 후대가 기억하려면 4.3 체험 2세대의 인터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