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인천 근대건축물 가치 '보존' 대신 '활용'으로 더하다

양지영 기자 2026. 2. 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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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운영 서양 잡화점이던 '백년이음' 지역재생 거점으로
70년대 주거 흔적 간직한 '이음1977' 과거로 시간여행 선사
실내 중정 설계 매력적인 '이음1978' 주민·관광객 소통의 장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백년이음 외관. [사진=양지영 기자]

문을 여는 순간 공간이 먼저 말을 건다. 세월의 흔적을 품은 인천 근대건축물은 '보존'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고 활용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과거 화교가 운영하던 서양 잡화점 건물 '백년이음'은 이제 지역재생 거점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갖는다. 1970년대 주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음1977'은 방문객들에게 옛 시절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선사한다. 독특한 실내 중정이 매력적인 근대 주택 '이음1978'은 지역 주민과 관광객에게 체험과 소통의 공간을 제공한다.

5일 인천도시공사(iH)에 따르면 인천시는 지난해 12월31일 이음1977(김수근 설계 송학동 주택)과 백년이음(옛 화교 점포 덕흥호)을 인천 우수건축자산 제1·2호로 등록했다.

iH는 '근대건축 문화 자산 재생사업' 일환으로 개항장 일대 근대건축 자산을 단순 보존 대상이 아닌 지역 문화와 경제를 잇는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형성된 건축물과 관련 문화 자산을 지역 랜드마크로 만들고 체류형 콘텐츠를 통해 유동 인구를 늘려 인근 상권 활성화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올해는 이음1978(공일곤 설계 송학동 주택)에 대해서도 우수건축자산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 과거 흔적과 현재 시간이 겹친 '백년이음'

지난달 30일 인천시 중구 개항장 일대 백년이음과 이음1977, 이음1978을 차례로 찾았다. 인천역 3번 출구로 나와 차이나타운 거리를 지나면 근대건축 문화 자산 재생 사업 건물인 백년이음을 만날 수 있다. 하얀 외관은 현대적인 인상을 주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백년이음 2층 내부. [사진=양지영 기자]

1·2층은 통째로 비어 있었다. 다음 전시를 위해 비워둔 공간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전시물로 느껴졌다.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리모델링을 거쳤지만 벽과 기둥, 천장 곳곳에 남은 기존 건축 양식은 이곳이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장소임을 보여준다.

iH에 따르면 백년이음의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백년이음 관련 사료 중 가장 오래된 1908년 촬영 사진을 통해 백년이음이 당시에도 같은 자리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축물은 서양식 석조 구조의 외관에 중국식 사합원 구조, 한국식 서까래 천장이 결합한 독특한 형태다. 과거 화교가 운영하던 서양 잡화점 '덕흥호', '동화창' 등으로 사용됐고 이후 해안천주교회를 거쳐 개인 소유로 이전돼 전시·카페 공간으로 활용됐다.

iH는 지난 2024년 12월 백년이음을 매입한 뒤 전시 공간으로 운영했다. 앞으로 팝업스토어, 인천시 프로그램 등과 연계해 개항장 일대 지역재생 거점 공간으로 키울 계획이다.

◇ 살던 집 그대로 들여다보는 '이음1977'

iH는 이음1977의 주거 흔적 그대로를 전시 공간, 전시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음1977은 1970년대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 철학이 반영된 주택으로 한 사람이 오랜 기간 실제 거주한 집이다. 내부는 당시 공간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거실과 방, 계단과 창문까지 생활의 결을 유지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시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활이 막 끝난 집을 그대로 마주하는 느낌이 든다.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이음1977 외관. [사진=양지영 기자]

창의 크기와 배치, 천장 등을 활용한 채광은 당시 주택 설계의 고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력 사용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설계가 담겼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어지는 계단과 높은 층고는 공간을 실제보다 넓게 느끼게 한다.

거실 한쪽에는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창이 있다. 큰 창과 작은 창은 각기 다른 풍경과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창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풍경을 보여준다.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이음1977 내부. [사진=양지영 기자]

이음1977은 최소한의 리모델링만 거쳤다. 시민 개방을 위해 안전성과 편의성을 보완하고 무허가 증축 부분을 철거해 원형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iH는 이 공간에서 해설 투어와 전시, 소규모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복원된 집이 아니라 '시간이 멈춘 집'을 걷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 이음1978, 살던 집에 '체험 공간'을 더하다

이음1978은 1970년대에 공일곤 건축가가 설계한 주택으로 중정을 품은 실내 구조가 특징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중앙 거실을 중심으로 투명 유리 천장 아래 중정이 시선을 끈다. 집 안 중정에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면 유리 너머 하늘을 볼 수 있다. iH는 리모델링을 거쳐 주민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도록 중정 동선과 휴식 공간을 정비했다.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이음1978 중정. [사진=양지영 기자]

이음1978은 '지금도 쓰이는 집'이다. '1883 개항살롱'이 이곳으로 이전해 운영 중이다. 1883 개항살롱은 1883년 인천항 개항의 역사성과 살롱이라는 소통 공간의 개념을 결합했다. 개항장 일대를 찾는 관광객과 지역 주민이 어울릴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필름 카메라 체험과 공방 프로그램, 개항장 체험 등 참여형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다. 공간은 전시를 보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고 대화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이 보존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인 체험과 참여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 공간을 묶어 지역을 키우다

iH는 백년이음과 이음1977·1978을 운영 체계 하나로 통합 관리할 계획이다. 이음1977은 개항장 정보와 전시·강연·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로컬 라이브러리로 활용한다. 백년이음은 유동 인구가 많은 입지를 살려 팝업스토어와 로컬 브랜드 홍보 공간으로 운영한다. 이음1978은 크리에이터 교육과 멘토링을 중심에 둔 공간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이들 공간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지역 작가와 민간 운영 단체, 공공기관 등이 참여를 통해 문화와 관광이 결합한 지역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iH의 목표다.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이음1978 내부. [사진=양지영 기자]

iH는 백년이음, 이음1977, 이음1978 운영 성과를 바탕으로 추가 근대건축 문화 자산을 발굴하고 원도심 경제 재생의 축으로 확장해 나간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무게감 있는 '보존'이라는 단어를 내려놓고 쓰임과 운영으로 시간을 이어간다는 방향성이 기대감을 더한다.

백년이음은 다음 전시를 3월로 예정하고 있다. 이음1977과 이음1978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한다. 다만 올해는 한시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신아일보] 양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