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못 잡고 세계 명사들만 잡은 ‘엡스타인’

성 착취범이자 억만장자 금융 사업가 제프리 엡스타인이 전 세계 유력 인사들과 어울렸다는 ‘엡스타인 스캔들’에 이름이 등장했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의회 증언대에 서게 됐다. 클린턴과 아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가 지난 2일 연방 하원 감독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겠다고 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
클린턴은 엡스타인이 미성년자 성 착취 혐의로 수감 중이던 2019년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스캔들이 점화하면서 연루 의혹이 제기된 대표적인 유력 인사다. 클린턴은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알지 못했고 관계는 20여 년 전에 단절됐다”고 주장하며 의회 출석 요구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지난달 클린턴이 엡스타인 저택에서 여성과 함께 욕조에 있거나 마사지받는 과거 사진 등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재점화했다. 클린턴이 엡스타인이 소유한 섬을 찾았다는 의혹도 제기됐고, 2001~2004년 엡스타인 전용기에 10여 차례 탑승했다는 기록도 나왔다.

클린턴은 “클린턴 재단의 인도적 업무 때문에 전용기를 이용한 적은 있지만, 엡스타인의 섬을 찾은 적은 없다”며 출석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공화당 주도 하원 감독위원회가 클린턴 부부를 의회 모독 혐의로 고발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백기를 들었다. 전직 미 대통령의 하원 청문회 출석은 1983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이후 43년 만이고, 강제로 증언에 나서는 것은 전례가 없다.
클린턴을 궁지로 몬 사진은 지난달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의 친분 관계를 주장하며 ‘물증’으로 공개한 사진 중 일부다. 여기엔 클린턴 뿐 아니라 트럼프 과거 사진도 있다. 그가 엡스타인과 함께 금발의 여성과 담소를 나누거나 젊은 여성들과 어울린 사진 등이다. 트럼프도 “오래전에 관계가 단절됐다”며 엡스타인 스캔들 연루 의혹을 일축했다. 그런데 유탄은 두 사람 중 클린턴으로만 향하는 상황이다.

민주당에서 불을 지피며 트럼프 2기 리스크가 될 것으로 여겨지던 ‘엡스타인 스캔들’의 여파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엡스타인 관련 문건을 주기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이 발효된 뒤 법무부의 문건 공개가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언급되지 않았던 이들이 새로 튀어나오거나, 기존 인사들의 추태를 시사하는 문건들이 쏟아지면서 트럼프 연루 의혹을 덮고 파문은 미국 너머로도 확산되고 있다.
엡스타인과 친분이 있다는 의혹을 받아왔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문란한 생활로 성병까지 걸렸다는 의혹에 휘말리게 됐다. 법무부가 지난달 30일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에 따라 공개한 350만쪽 분량 문건에 ‘게이츠가 러시아 여성들과 성관계한 뒤 성병에 걸린 사실을 당시 배우자 멀린다에게 숨기려 했다’는 엡스타인의 이메일 내용도 포함됐다. 게이츠는 “터무니없고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지만, 멀린다는 인터뷰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프다”며 전 남편을 직격했다.
불똥은 유럽으로도 튀었다. 미국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의 중진 정치인 피터 맨델슨은 엡스타인으로부터 수만 달러를 은행 계좌로 송금받은 기록과 속옷 차림 여성 옆에 서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소속 노동당을 탈당하고 상원 의원직도 사임했다. 이미 엡스타인 스캔들로 왕실에서 쫓겨난 앤드루 전 영국 왕자(찰스 3세 국왕의 동생)는 바닥에 누운 여성의 신체에 손을 대고 있는 사진이 공개됐고, 전처 세라 퍼거슨도 엡스타인에게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노르웨이 메테마리트 왕세자비는 2011~2014년 엡스타인과 수십 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사과문을 냈다.
케이시 와서먼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엡스타인의 전 연인이자 성범죄 공범인 길레인 맥스웰과 주고받은 이메일이 나왔다. 장수·예방의학 전문가 피터 아티아 박사와 미국 프로풋볼 뉴욕 자이언츠 공동 구단주 스티브 티시도 엡스타인과 음란한 이메일을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공개 문서에서는 트럼프의 이름도 수백 차례 등장하지만 민주당과 반(反)트럼프 진영이 고대하던 구체적인 ‘물증’은 포함되지 않았다. 트럼프 2기 인사들도 등장했다. 케빈 워시 연방준비제도 의장 지명자는 2010년 엡스타인 주최 크리스마스 모임 참석 예정 명단에 이름이 나왔고,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2012년 엡스타인 소유 섬 방문을 계획한 정황이 드러나 “2005년에 모든 관계가 단절됐다”는 주장과 배치됐다. 하지만 트럼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정황은 부족하다.
‘엡스타인 파일’의 후폭풍이 백악관을 비껴가는 양상을 보이면서 트럼프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3일 백악관에서 “엡스타인 파일에서 나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모두 음모론”이라며 “이제는 국가가 다른 일로 넘어가야 할 때”라고 했다.
트럼프가 지난해 엡스타인 파일 공개 방침에 동의하고 관련 법에 서명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법무부에 포진한 측근들의 도움으로 엡스타인 스캔들을 정적에 대한 역공의 기회로 바꾸는 상황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문건 공개 때 “주요 인사와 정치인들은 편집되지 않았다”면서도 “(트럼프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2020년 대선 직전 연방수사국(FBI)에 제출된 문서 중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자극적인 주장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이 주장들은 근거가 없으며 허위”라고도 했다. 법무부에서 문건 정리와 공개를 총괄하고 있는 토드 블랑시 차관은 트럼프의 야인 시절 형사재판을 담당한 변호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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