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글맛’으로 알린 한국 ‘손맛’… 고추장 품절 대란도

“고추장이 마트에서 동이 나고, 제가 쓴 손맛(son-mat)이란 단어에 미(美) 언론이 환호할 때, 한국이 주류가 되는 구나 싶었어요.”
미 뉴욕타임스 요리 칼럼니스트 겸 작가인 에릭 김(한국명 김준호·35)은 뉴욕타임스 대표 코너 중 하나인 ‘쿠킹(Cooking·요리)’을 통해 수백만 조회수를 올리는 요리 인플루언서다. 2021년 뉴욕타임스에 입사한 뒤 레시피(조리법)를 개발하고 이따금 직접 요리 시연 영상도 선보이는데, 요리 제목과 음식 설명에 고추장(gochujang), 된장(doenjang), 배추김치(baechu kimchi), 계란 밥(Gyeran Bap), 손맛(son-mat) 같은 한국어 고유명사를 그대로 음차 표기한다. 2022년 ‘집밥’ 콘셉트로 선보인 요리 책 ‘코리안 아메리칸’은 뉴욕타임스·LA타임스 베스트 셀러가 됐다.
최근 온라인으로 만난 그는 “한국어로 레시피 제목을 올리는 것부터가 미국 사회가 한국 음식을 알아보고 받아들여 줄 성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면서 “한국어 표기는 ‘모국 음식’인 한식을 널리 알리고 정체성을 부여하는 나만의 요리 외교(culinary diplomacy)”라고 밝혔다. 특히 “엄마의 맛이자 각자의 개성을 표현할 때 쓴 ’손맛’의 경우, 영어엔 없는 표현이라 미국 언론들이 그 뜻에 대해 인터뷰 요청을 많이 해왔던 단어”라고 덧붙였다. “요리가 보통 정확한 계량을 통한 수학과 공학·논리(brain)로 이뤄진다는 이 세계에서 감성 지능이 뛰어난 한국다움(Koreanness)을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미 애틀랜타로 이민 온 사업가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이민 2세인 에릭 김은 “요리 전문 칼럼니스트가 된 건 우연이자 운명”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문학도를 꿈꿨다고 했다. 주부였지만 예술성이 깊은 어머니를 보며 미술과 책에 빠져들었다. 미 뉴욕대(NYU) 영문학 학사를 조기 졸업하고 미 컬럼비아대에서 영문·비교문학·철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에 직행했다. 문학 교수 꿈을 품고 학부생 대상 작문 강의도 했다.
“박사 3년 차 구술 시험에 실패하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쓴맛을 봤지요. 마침 예전 선배가 음식 전문 케이블 방송 채널인 ‘푸드 네트워크’에서 레시피 데이터 입력 직원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새 길을 개척했어요. ‘푸드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됐죠!” 이후 미 ‘푸드52’ 등에서 레스토랑, 셰프 등을 취재하며 음식 문화사를 곁들인 요리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철학·문학을 바탕으로 요리의 뿌리를 연구하며 그 ‘맛’을 내기 위한 셰프들의 비법을 취재하면서 자신만의 조리법도 개발하게 됐다.

뉴욕타임스에서 그가 역점을 두고 쓴 기사는 바로 ‘김치’ 시리즈. 입사 직전인 2020년 ‘김치하다(김치를 동사(verb)로 생각하기)’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 등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배추·오이·무·파 등 대표적인 재료 외에도 깻잎·토마토 등 상당수 채소로 김치를 만들 수 있고, 바로 무쳐서 샐러드처럼, 익혀서, 또 볶거나 무쳐서 만들 수 있는 ‘한국 요리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좋아했던 음식이지만, 미국서 자라는 동안 일부 친구에게 손가락질받았고, 또 현재는 가장 ‘힙’한 음식을 넘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김치의 문화적 생동감을 담아내고 싶었다.
뉴욕타임스 내부에선 그의 김치를 비롯해 어머니와 직접 담근 김장 김치 등 김치 시리즈를 흥미롭게 받아들였지만 정작 상처가 된 건 한인 사회의 비판이었다. “한국 음식이 나온다니 자랑스럽다는 분들도 물론 많았죠. 하지만 ’네가 뭔데, 뭘 알고 얘기하느냐’라는 등의 말씀이 특히 상처였던 것 같아요.” 그랬던 이들이 지금은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김치에 이어 그의 고추장 시리즈 역시 인기 폭발. 특히 2022년 연말 홀리데이 선물 특집으로 선보인 ‘고추장 캐러멜 쿠키’는 미 ABC 방송에서 그를 초청해 시연 쇼를 선보일 정도로 화제였다. 동네 마트 가는 곳마다 고추장 품절 대란이 일기도 했다.

그랬던 ‘고추장’ 레시피와 그의 이름이 최근 다시 화제가 됐다. 지난해 8월 말부터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 때문. 지난해 방영 당시 에릭 김이 뉴욕타임스를 통해 “요리를 사랑의 언어로 사용한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호평한 뒤 드라마 팬들은 물론, 드라마 속 ‘고추장 버터 비빔밥’ 등 요리는 소셜 미디어를 강타했다.
최근 넷플릭스가 발표한 ‘지난해 하반기 시청 시간 보고서’에서 국내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의 ‘폭군의 셰프’가 ‘기묘한 이야기 시즌5’ ‘웬즈데이 시즌2’에 이어 전 세계 3위이자 비영어권 1위를 기록하면서 에릭 김이 인기 확산의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에릭 김은 “특정 한국어가 영어 사전에 언제 들어가는지 배경과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어떤 개념이 주류에 침투했는지 알게 돼 책임감도 느낀다”면서 “미국 현지인들이 자연스레 ‘고추장’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된장’을 알고 사랑할 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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