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킹 달러’를 흔드는 트럼프

방현철 기자 2026. 2. 4.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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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달러의 힘 뒷받침하는
‘연준, 무역, 동맹’ 세 축 공격
트럼프의 ‘약 달러’ 도박에
외풍에 강한 경제로 대응해야

190여 년 전 괴테가 쓴 ‘파우스트’ 2부는 나라 곳간이 빈 황제의 얘기로 시작한다. 파우스트에게 쾌락과 영혼을 바꾸자는 제안을 했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황제에게 재정난을 벗어날 묘안을 준다. 아직 파내지지 않은, 땅속에 묻혀 있을 금·은을 담보로 ‘지폐’를 내라는 것이다. 황제는 “엄청난 사기”라고 하지만, 결국 악마의 꼬임에 종이 조각에 1000크로네라고 쓰고 서명한다. 지폐를 뿌려 황제는 군대에 밀렸던 급료를 주고 빚을 갚는 등 재정 위기에서 벗어난다. 괴테는 “반쯤 죽어 곰팡내 나던 도시에, 모든 것이 살아나 왁자지껄 즐기며 바글거린다”고 썼다.

스위스 경제학자 한스 반스방거는 파우스트의 ‘지폐 장면’이 가치 없는 종이를 화폐로 바꾸는 ‘금융 연금술’을 보여준다며, 현대 경제가 이런 연금술적 속성을 계승한다고 했다. 금을 캐서 화폐로 쓰는 대신 금이 있다는 허구의 믿음, 즉 신용에 기반해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 위험성도 있다. 2010년대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였던 옌스 바이트만은 파우스트의 지폐 장면을 언급하며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돈을 찍기 시작하면 파우스트의 황제처럼 초기엔 달콤한 호황을 누리지만 결국 통화 가치 하락과 사회적 혼란이 온다고 경고했다.

달러도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달러와 금을 더는 교환해 주지 않겠다고 하자 파우스트의 지폐 같은 운명에 처했다. 오일 쇼크까지 터져 인플레이션이 덮치자 달러 가치는 1978년 말까지 서독 마르크 대비 45% 넘게 폭락하며 위기감이 커졌다.

하지만 신뢰를 다시 쌓으며 금의 뒷받침 없이 ‘킹 달러’ 왕좌에 올랐다. 화폐금융론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 UC 버클리 교수는 달러 지위를 지탱한 세 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독립적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다. 볼커, 그린스펀 등 과거 연준 의장들은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고 금리를 움직여 달러 가치를 지켰다. 둘째, 개방된 무역 시스템이다. 자유 무역에는 달러같이 누구나 원하는 화폐가 있어야 한다. 작년 국제 결제의 절반 넘게 달러로 이뤄졌다. 셋째, 견고한 지정학적 동맹이다. 동맹국은 달러를 외환보유액 등으로 갖고 있다. 거꾸로 러시아 외환보유액 중 달러는 2014년 43%였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즈음엔 10%쯤으로 줄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모형과 달러화 지폐를 형상화한 이미지. 정책 리스크와 달러 약세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 세 축을 모두 공격하고 있다. 우선 연준을 대통령이 통제하려고 한다. 연 3%대 중후반인 금리를 1%로 낮추라는 압력을 공공연히 했다. 케빈 워시를 새 의장에 지명했지만 금리 인하 요구는 계속될 것이다. 무역 시스템은 관세를 무기 삼아 조각 내고 있다. 그리고 ‘돈로주의’를 내세운 그린란드 병합 시도 등에서 보듯 과거 동맹도 무력화시키고 있다.

길게 보면 ‘킹 달러’의 힘은 빠지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세계 외환보유액 중 달러 비율은 최근 56.9%로 30년 만에 최저다. 2000년대 초만 해도 70% 내외였다. 이런 추세에 트럼프가 ‘약 달러’로 기름을 붓고 있다. 미국 제조업을 부활시키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 귀결이 ‘약 달러’ 정도가 아니라 ‘킹 달러의 붕괴’로 커질 위험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원래 ‘약 달러’면 한국 원화는 강세로 가야 한다. 하지만 작년 원화는 이례적으로 ‘약 달러’와 동반했다. 그 근본 원인은 석유화학·철강 등 구산업이 무너지는데, 이를 대체할 혁신은 눈에 띄지 않아 국가 경쟁력이 하락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외풍에 강한 경제 체질을 만들어야 트럼프의 ‘약 달러’ 도박으로 요동치는 글로벌 화폐 질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한 아직 캐내지 않은 보물은 신산업 육성과 혁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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