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닌 '정보'가 된 사람들 … 임무 뒤에 남는 잔혹한 진실
'베를린' 잇는 해외 첩보물
국정원·北보위부 요원들간
정보원 사이에 둔 충돌 그려
조인성·박정민 열연 돋보여
극장 부술듯한 실감 액션 매력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옷만 갈아입고 폼은 그대로인 동어반복적 액션물이 아니었다. 류승완의 필모그래피는 공직사회의 그늘을 희비극으로 묘사한 문제작들로 채워져왔다. 실적과 승진을 곧 생존으로 여기는 검경('부당거래'), 몸으로 때우는 '노동'으로서의 공권력('베테랑'), 국가가 무력화된 변경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말단 외교관('모가디슈'), 숙청에 따른 죽음조차 행정 절차처럼 수행하는 정보요원('베를린') 등이 그랬다.
누군가를 보호할 책무를 가진 이들이 '고장 난 시스템, 윤리적 딜레마, 상호 이해 충돌' 때문에 스스로 와해되고 붕괴되는 자리에서 누출하고 마는 인간적 균열에 류승완은 주목해왔고,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영웅적인 영웅' 대신 '고뇌하고 상처받는 영웅'이 다수였다. 오는 11일 개봉을 앞둔 류승완의 설 연휴 대작 '휴민트' 역시 균열을 일으킨 제도 속에서 개인이 떠안는 책임의 무게를 묻고 있다. 언론에 먼저 공개된 '휴민트'를 4일 살펴봤다.
중심인물은 한국 국정원 블랙요원 조 과장(조인성)이다. 조 과장은 북한산 마약 '삥두'가 한국에 유입된 경로를 조사하던 중 현장 정보원(휴민트)의 죽음을 마주한다. 좌절하던 조 과장은 휴민트가 남긴 단서를 좇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그곳에서 북한 식당에 근무하는 채선화(신세경)를 휴민트로 포섭하는데,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채선화의 지인이자 북한 보위부 조장 박건(박정민)이 인신매매 사건 조사차 파견된 상태였다.
삥두 경로를 탐색하는 조 과장과 인신매매 주범을 발본색원하려는 박건은 자꾸만 채선화를 중심으로 얽히기 시작한다. 그들이 목표에 접근할수록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인 둘은 하나로 합쳐진다. 둘은 각자의 커튼을 열고 더 잔혹한 진실 앞에 서게 된다.
류승완 영화의 액션은 '휴민트'에서 또 한번 도약한다. 스크린에서 뛰쳐나와 극장을 부술 듯한 극한의 난투극, 관객의 뼈마디까지 저려올 정도의 기발한 액션이 쾌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극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액션을 바라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적국의 첩보원을 마주한 남북 정보요원이란 점에서 영화 '휴민트'는 류 감독의 2013년 영화 '베를린'을 연상시킨다. '베를린'의 세계관은 '휴민트'에서 공유되며, 체제 속에서 마모되는 개인이란 점에서도 두 영화는 결이 비슷하다. 그러나 '휴민트'는 '베를린2'가 아니다. '휴민트'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고 있다. '베를린'이 버려진 개인으로서의 표종성 대위(하정우)에게 집중한다면 '휴민트'는 탈출구 없는 개인들의 구원 서사에 집중한다.
류 감독은 객석이 요구하는 욕망의 좌표를 정확히 읽어내는, 귀신 같은 감각을 지닌 감독이다. 그는 관객을 해부대 위에 올린 뒤 어디를 눌러야 통증이 오고, 어디를 건드려야 치명적인지, 또 어디를 건드리면 안 되는지를 아는 사람처럼 작두를 탄다. 망가진 육체에서 보이지 않는 혈관을 집요하게 찾아내고, 다트 핀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꽂아넣으며, 라이터 불꽃을 망설임 없이 점화시키는 '휴민트'의 여러 시퀀스가 이를 증명한다. '휴민트'를 기점으로, 2026년은 배우 조인성의 해로 기억될 듯하다. 조인성은 이번 '휴민트'를 포함해 나홍진 감독의 '호프',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에서도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호프'에선 마을을 공격한 생명체를 쫓는 사냥꾼 성기 역을, '가능한 사랑'에선 남편 상우 역을 맡았는데 배역마다 색깔이 다르다.
박정민도 배우로서의 정점을 여지없이 증명한다. 첫 등장 신부터 박정민은 이 영화의 온도를 바꿔버린다. 옆자리에 앉은 친근한 오빠, 어딘가 부족해 보이기도 했던 그의 캐릭터는 첫 등장과 동시에 휘발되고, 그 자리에 '배우 박정민'을 앉힌다. 박정민은 블라디보스토크 강추위의 입김으로도 관객에게 말을 한다. 신세경은 이질감 없는 사투리 연기로 몰입감을 끌어올린다. 그의 열연은 '베를린'에서 주독일북한대사관 통역관 련정희(전지현)에게 밀리지 않는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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