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경루’와 광주 목사 신보안

노성태 2026. 2. 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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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51)신보안

-희경루, 재건립하다
2023년 9월20일 광주공원에 희경루가 중건됐다. 희경루가 처음 건립된 지 572년 만이었다. 신숙주는 ‘희경루기’(喜慶樓記)에서 희경루를 ‘갑어동방’(甲於東方)이라고 명명했다. 동방은 중국의 동쪽 나라 즉 조선을 가리키는 말이니, 희경루는 조선 최고의 ‘루’인 셈이다. ‘희경’(喜慶)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뜻을 품고 있다.
2023년 9월20일 광주공원에 중건된 희경루 전경

원래 희경루가 있었던 곳(충장로 우체국)은 이미 허물어진 공북루(拱北樓)터였다.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에 부임한 현감 안철석은 고을의 원로들을 모아 놓고 “광산은 전라도의 큰 고을인데, 고을에 유람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요. 광산은 이 도의 요충지로 사객(使客)이 벌 모이듯 하는데, 막히고 답답하고 깊고 가려져서 시원하게 해줄 길이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의견을 묻는다.

이에 광주 원로들은 “높고 밝고 시원스러운 땅으로는 공북루의 옛터만 한 곳이 없다”면서 새로운 누각 건립에 힘을 보탠다.

새로운 누각이 완성될 무렵 광주민들의 숙원인 광주목으로 복원이 이뤄진다. 당시 광주는 읍민 노흥준의 목사 신보안 구타 사건으로 인해 무진군으로 강등된 상태였다. 그런데 강등된 지 20년이 되던 1451년(문종 1), 필문 이선제 등 지역의 원로들과 관리들이 옛 이름으로 복구해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문종이 허락해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된 것이었다. 광주목으로의 승격 소식이 전해지고, 마침 새로 짓던 누각마저 낙성되자, 광주 원로들은 누각의 이름을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희경루’라 붙이자고 건의한다. ‘공북루’ 이름이 ‘희경루’로 바뀐 연유다.

현감 안철석이 건립한 희경루가 불에 소실되자, 1534년(중종 29) 신한(申瀚) 목사가 다시 짓는다. 이후 희경루는 광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지만,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2018년은 전라도라는 이름이 생겨난 지 천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전라도의 거읍이었던 전주와 나주, 광주 등 전라도의 역사를 담는 ‘전라도 천년사’가 편찬되었고, 광주에서는 광주의 랜드마크였던 ‘동방제일루’라 불린 희경루를 옛터인 충장우체국이 아닌 광주공원에 중건한다.

- 읍민 노흥준, 목사 신보안 구타 사건
왜 읍민 노흥준은 고을의 원님인 목사 신보안을 구타했을까? 이는 ‘세종실록’ 11년 11월13일자에 실린 우부대언 김종서의 “광주목사 신보안이 고을 기생 소매(小梅)와 간통해, 그의 서방 전 호군 노흥준이 그 기생을 결박하고 신보안을 능욕했다고 암행 찰방 윤형이 보고해 왔다”는 말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고을 기생 소매의 서방은 읍민인 전 호군 출신 노흥준이었다. 그런데 목사가 자신의 첩인 소매와 간통하자,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능욕했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은 감찰을 파견해 추국(중죄인에 대한 신문) 후 보고하라고 사헌부에 명했고, 사헌부 감찰 이안상이 광주에 파견된다.

이안상이 신보안의 사인을 조사한 내용이 ‘세종실록’ 12년 2월10일자에 실려 있다. “감찰 이안상이 광주 목사 신보안의 사인을 신문하니, 신보안의 반인(伴人) 오한이 말하기를, ‘관아에 있다가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가 보니, 고을 사람 노흥준이 보안을 때려서 상처를 입혔는데 결국 죽었습니다’ 했다. 또 그 자세한 사연을 물으니, 오한이 숨기고 대답하기 않기에, 세 번이나 형장을 치며 신문해도 역시 고백하지 않았다. 다시 장은 치지 않고 물으니, ‘흥준이 때려서 죽었습니다’라고만 하므로, 드디어 오한을 하옥시켜 두었는데, 오한이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 것이다.”

감찰 이안상이 신보안의 측근인 오한이라는 사람에게 신보안의 사인을 묻자 ‘노흥준이 때려서 죽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한이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신보안의 측근 오한의 자결은 뭔가가 수상쩍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형조정랑 정길홍과 감찰 이인손을 다시 보내 조사토록 한다.

정길홍과 이인손의 조사 결과가 ‘세종실록’ 동년 3월26일자에 나오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 목사 신보안이 1428년(세종 10) 봄에 측근인 오한을 시켜 노흥준의 기첩(妓妾) 소매를 중매해 간통했는데, 그 후 4월에 전 사정(司正) 김전이 그 사실을 노흥준에게 알린다. 소식을 전해 들은 흥준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목사 신보안의 옆구리와 볼기와 무릎을 서너 번 걷어찬다. 구타가 있은 4달 후인 7월22일, 광주목사 신보안이 죽는다. 그러나 정길홍이 밝혀낸 신보안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노흥준의 구타가 아닌 이질이었다.

목사 신보안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이질이었고, 노흥준의 기첩을 간통했다고 해도 읍민 노흥준의 광주목사 신보안의 구타는 용납될 수 없었다. 노흥준은 장 백대를 맞고 변방의 군정(군인)으로 충원됐고, 처자는 광주에서 쫓겨나고, 집과 전지도 몰수된다. 신보안과 소매의 간통 사건을 노흥준에게 알린 김전도 ‘수령의 과실을 폭로했다’ 해 장 백대를 맞았고, 오치선·한혜·이안상 등은 노흥준이 범한 죄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해, 각각 장 80대와 70대를 맞는다.

노흥준의 목사 구타 사건의 후폭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3품 목사가 다스리는 광주는 4-5품의 관리가 다스리는 ‘군’(郡)으로 강등된다. 무진군으로의 강등이 그것이다. 강등의 근거로 형조는 “선덕(宣德) 4년 5월의 수교(受敎, 임금이 내린 명령)에는 ‘품관과 인민이 만약 은근히 부추겨서 고소하든지, 혹은 제가 스스로 고소하는 자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다면, 지관(知官) 이상이거든 칭호를 내리고, 현관(顯官)이거든 속현으로 강등시킨다’고 하였는데, 흥준이 수령을 구타하고 모욕한 죄는 잇달아 고소한 죄보다 심하다”는 것이 광주의 관호(官號)를 강등시킨 근거였다.

선덕은 명나라 선종의 연호로, 선덕 4년은 1429년(세종 11)에 해당한다. 선덕 4년의 수교가 내려진 지 1년 만에, 광주가 그 희생양이 된 셈이다.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된 것은 1430년(세종 12)이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 무진군은 다시 광주목으로 복호된다. 광주목으로의 복호는 광주인에게는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중건된 공북루의 이름이 ‘희경루’가 된 연유다.
희경루 경내에 세워진 류동운 열사 추모비

- 희경루, ‘동방 제일루’였다
희경루가 처음 건립된 것은 1451년(문종 1)이었다. 희경루가 건립되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나주 출신의 신숙주가 ‘희경루기’를 남긴다.

‘희경루기’에는 희경루 건립 경위와 공북루가 아닌 희경루라 이름 붙인 연유, 읍민들의 참여, 그리고 규모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돼 있다. ‘희경루기’에는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인데,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甲於東方)”이라고 서술돼 있다. 오늘 남아있는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그리고 평양 부벽루를 꼽는다. 복원된 희경루는 남원 광한루 정도의 크기인데, 신숙주가 ‘동방 제일루’라 칭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보다는, 가장 큰 누각만큼 웅장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희경루는 광주목으로의 승격에 대한 광주민들의 기쁨과 열망이 진하게 묻어 있어 광주 읍민들의 자랑이었고 랜드마크가 된다.

광주의 자랑이던 희경루는 1533년(중종 28) 화재로 소실된다. 그리고 목사 신한(申瀚) 대인 1534년(중종 29), 다시 지어진다. 희경루를 중건한 신한은 처음 지어진 희경루의 ‘기’를 쓴 신숙주의 손자인데, 희경루와의 인연이 흥미롭다. 이때 중건된 희경루는 1866년 목사 안응수에 의해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12년 광주우편국(현 충장우체국)이 건립될 무렵으로 추정된다. 우편국 옆에 남아 있다가 더 늦게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2023년 희경루가 광주공원에 다시 중건될 수 있었던 것은 보물로 지정된 ‘희경루방회도’ 덕분이었다. ‘희경루방회도’란 1567년(명종 22) 희경루에서 1546년(명종 1) 증광시의 문·무과 합격 동기생 5명이 20년 만에 만나 연회를 열고 이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으로, 세로 98.5㎝, 가로 76.8㎝크기다.
보물로 지정된 희경루 방회도(동국대 박물관 소장)

희경루 방회도에 등장하는 참석자는 광주 목사 최응룡, 전라도 관찰사 강섬,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 전라도 병마우후 유극공, 낙안 군수 남효용 등 5인이다. 이들은 모두 전라도 인근에서 근무하거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동기생들이다. 이들 중 최응룡·임복·강섬은 1546년(명종 1) 증광시 문과 합격자들이고, 유극공과 남효용은 무과 합격자이다.
희경루 방회도에 등장하는 인물

전라도 관찰사 강섬의 관직이 제일 높지만, 광주 목사 최응룡이 상석인 중앙에 앉아 있다. 최응룡의 나이가 제일 많고, 과거시험 당시 장원급제를 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과거 급제 동기생들이 20년 만에 만나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희경루방회도’는 사라진 희경루의 모습을 오늘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희경루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한 주인공 중 한 명은 당시 광주 목사 신보안이다. 그런데 신보안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극히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광주 목사 당시 노흥준의 애첩을 가로챈 내용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서도 과거급제자 명단에서도 검색이 불가능이다. 단지, 광주의 수령들을 정리한 ‘광주읍지’(1879)의 ‘읍선생(邑先生, 고을의 수령)’ 조에, 신보안은 “세종 경술(庚戌, 1430)에 읍인(邑人)의 변을 만나 군으로 강등했는데, 사실이 연혁조에 나타나 있다”고만 서술돼 있다.
광주읍지 ‘읍선생’조의 신보안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희경루라는 누각 이름은 기생 소매를 둘러싼 읍민 노흥준과 목사 신보안의 애정 사건이 발단이었다.

역사는 우연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방향을 틀기도 한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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