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보다 강한 압박 '에너지'…트럼프가 다시 석유를 택한 이유 [트럼프의 석유전쟁]

하지은 2026. 2. 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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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연료 수명 연장에 베팅한 美, 에너지 패권 전략 재가동
관세 한계 학습한 美, 중국 압박 수단으로 에너지 선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1월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석유 산업 경영진과의 회의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REUTERS

각국이 탄소중립을 외치는 흐름 속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석유와 가스를 다시 전면에 내세운 배경에는 화석연료가 여전히 세계 경제와 산업 질서를 좌우하는 핵심 자원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친환경 전환이 글로벌 기조로 자리 잡았지만, 실제 산업 현장에서의 전환 속도는 더디고 기존 에너지 구조를 단기간에 바꾸기에는 제약이 크다는 인식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석유와 가스를 쥔 쪽이 에너지 주도권을 갖고, 그 영향이 국제 정세로까지 번지는 구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에너지 패권, 여전히 화석연료에 있다'…美의 계산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와 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절반을 웃돈다. 전력 부문에서는 재생에너지 비중이 확대되고 있지만, 수송·화학·중공업 등 산업 현장에서는 화석연료 의존도가 크게 낮아지지 않았다. 글로벌 석유 소비량도 하루 약 1억 배럴 수준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단기간에 이를 대체할 만큼 안정적인 에너지원이 아직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화석연료의 영향력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본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트럼프는 탄소중립 논의와는 별개로 화석연료의 가치가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고 에너지 가격과 공급망 주도권을 쥐려 한다”며 “IEA가 제시한 석유 수요 정점 시점도 뒤로 밀리고 있고, 유럽의 탄소중립 역시 예상보다 속도가 더디다”고 말했다.

이 같은 판단은 미국의 달라진 에너지 위상과도 맞물린다. 미국은 2018년 이후 하루 1300만 배럴 안팎의 원유를 생산하며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셰일 혁명 이후 원유와 천연가스를 모두 순수출하는 국가로 전환됐고, 액화천연가스(LNG) 수출량도 2023년 기준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에너지 공급과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함께 확대됐다는 분석이다.

석유 시장에서는 생산량 못지않게 수송로와 거래 구조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말라카 해협과 호르무즈 해협 등 주요 해상 요충지를 통과하는 구조여서, 중동이나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긴장만 고조돼도 국제 유가가 즉각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에너지를 쥔 쪽이 국제 정치·외교 환경까지 좌우할 수 있는 이유다.

< 베네수엘라 가스 美수출 > 미국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한 뒤 처음으로 베네수엘라산 액화석유가스(LPG)가 미국으로 직수출됐다. 지난달 31일 베네수엘라 동북부 바르셀로나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LPG 운반선에서 선원들이 베네수엘라 국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中 겨냥한 압박…관세 정책 한계 학습했나

미국의 에너지 구상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재생에너지 설비와 핵심 광물 가공에서는 앞서 있지만, 제조업의 실제 원가를 좌우하는 에너지원은 여전히 수입 원유와 가스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은 원유의 약 70%, 천연가스의 4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특히 수입 원유를 해상 수송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여서, 공급 물량과 주요 운송로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가 가격을 조절할 경우 중국 제조업 전반에 직접적인 비용 압박이 가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빙현지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값싼 석유를 안정적으로 들여오지 못하면 중국 제조업 전반의 비용이 함께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에너지는 중국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충격을 주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위안화로 결제하던 석유 거래를 막으려는 움직임도 중국의 원유 조달 비용을 높여 부담을 키우는 동시에, 달러 중심의 석유 거래 질서를 지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관세 정책의 한계를 학습한 결과라는 시각도 제기된다. 대중 고율 관세가 중국의 대미 수출을 베트남 등 제3국으로 우회시키며 압박 효과를 분산시킨 반면, 에너지는 생산지나 원산지를 바꾸기 어려워 보다 직접적인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빙 연구원은 “관세는 우회와 보복이 가능하지만, 에너지는 공급망을 쥔 쪽이 상대국 산업 전체를 압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AFP

미국 내부적으로는 물가 관리라는 실익도 맞물렸다는 평가다. 이성규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유가 안정을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라며 “베네수엘라산 중질유 확보는 정제시설 가동과 유가 안정이라는 효과를 동시에 노린 선택”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도 이 전략과 맞닿아 있다. 빙 연구원은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등 공화당의 핵심 지지 기반은 전통적으로 에너지 산업과 맞닿아 있다”며 “에너지 산업 육성은 공화당에서 늘 중요한 정치적 의제였다”고 말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국유화로 축출됐던 엑슨모빌이 다시 현지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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