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칼바도스와 골프

방민준 2026. 2. 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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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칼럼과 관련 없는 참고 이미지입니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골프한국]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 증류주 칼바도스(Calvados)를 마실 때마다 궁금했다. 완전히 자란 사과가 어떻게 병 안에 들어가 있을까.



 



대학에 들어가 도서관에 붙박이처럼 앉아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던 시절, 독일 작가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개선문'을 읽으면서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칼바도스란 술에 대한 궁금증을 떨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1938~39) 파리에 머무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 소설은 사실 칼바도스에 취한 소설처럼 보일 정도였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 종합병원의 유능한 외과의사였지만 나치 횡포에 반대하다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친구들과 애인을 잃고 어렵게 파리로 망명했다. 여권 없는 불법입국자, 유령의사인 그는 매일 술을 끼고 산다. 주인공 주변엔 내일이 없는 사람들이 모였고 그들은 압상트(absinthe)와 칼바도스를 마셨다. 압상트는 중독성이 강한 68도의 증류주로 로트렉, 고흐, 드가, 랭보 등 당시 예술의 천재들이 즐긴 술이다. 고흐가 귀를 자른 것도 압상트에 취해서였다고 전해진다.



 



라비크가 즐겨 마신 칼바도스는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지역의 칼바도스 지방 사과로 만든 브랜디로 알코올 도수는 40~45도다. 사과의 달고 시큼한 향이 나고 값이 싸 돈 없는 망명객들이 즐겼다.



 



나중에 파리에 갈 기회가 생겨 그 칼바도스를 사와 술장에 모셔두었다. 병 안에 온전한 사과가 통째로 들어간 귀한(?) 술이라 개봉을 미루다 거의 30여년이 지나 술맛을 보았다. 목젖이 짜릿하면서 사과향기가 났다. 사과가 들어있지 않은 칼바도스가 대중적으로 팔리고 사과가 들어간 칼바도스는 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어떻게 온전한 사과가 병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최근에야 검색을 통해 그 비밀을 알았다.



 



그 비밀은 단순하면서도 우아했다. 사과가 아주 작고 단단한 유년기일 때, 병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 안에 사과를 넣으면 사과는 햇빛과 공기를 받으며 병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병은 사과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사과는 병의 형태를 받아들이며 병 안에서 큰다. 충분히 자라 수확할 시기가 되면 병째로 따서 안을 씻고 사과 브랜디를 채워 넣는다. 



즉, 사과가 병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병이 사과를 품고 그 성장을 끝까지 지켜본 결과라는 데 나는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뭔가 강하게 내 머리를 파고 들었다.



 



이 과정은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병을 잘라 사과를 집어넣고 다시 접착시키면 병도 상하고 사과도 온전하기 어렵다. 오직 긴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환경을 마련해주는 인내만이 가능한 방식이다. 



 



이쯤 되면 골프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골퍼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스윙을 완성된 틀에 빨리 집어넣고 싶다." 그래서 이미 완성된 프로의 스윙, 교과서적인 폼이라는 병을 먼저 들이민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몸과 감각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 애쓴다.



 



결과는 어떨까?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고, 오래 가지 않는다. 마치 다 자란 사과를 병에 넣으려다 사과를 일그러뜨리고 병을 깨뜨리는 것처럼.



좋은 골프는 병 속 사과처럼 자란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감각으로 시작한다. 임팩트 순간의 맑은 소리, 공이 맞아나가는 촉감,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느낌 등.



 



그 작은 '사과'를 보호해 줄 환경이 필요하다. 무리한 교정 대신 끈기 있는 반복, 조급함 대신 풍부한 라운드 경험, 결과보다 과정에 대한 진득한 관심 등. 그리고 병은 스윙을 가두는 틀이 아니라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울타리로 존재해야 가능하다.



 



몸이 먼저 자라고, 감각이 익고, 판단이 성숙해진 뒤에야 비로소 "아, 이게 내 스윙이구나!"라는 형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때의 스윙은 누가 봐도 억지스럽지 않다. 병 안에 들어 있지만, 온전한 사과처럼.



 



칼바도스는 사과를 으깨 바로 술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렸다. 사과가 자라고, 발효되고, 증류되고, 다시 숙성되는 시간을 존중한 것이다. 그래서 그 술은 독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서민적이면서도 품위가 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골프도 그렇다. 빨리 스코어를 만들 수는 있어도 깊이를 만들 수는 없다. 깊이는 반드시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결국 병 속 사과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형태를 먼저 만들지 말고, 성장을 먼저 허락하라.'



 



골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스윙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골퍼가 먼저 자라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골프는 마실수록 독하지 않고, 볼수록 자연스럽고,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마치 병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 한 알의 사과처럼.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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