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과 약탈적 경제 재편의 시대 [조원경의 경제·산업답사기]
![그린란드의 ‘피투피크 우주기지(Pituffik Space Base)’. 이미 미군이 운영 중이며, 섬을 침공하지 않고도 ‘골든 돔(Golden Dome)’ 인프라를 수용할 수 있다. [로이터]](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03/ned/20260203110946757afoo.jpg)

세계 경제의 기류는 다보스에서 들려온 기만적인 평화의 소식과 함께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 그동안 공정 무역과 상생을 노래하던 글로벌 시장은 이제 거대 권력이 동맹의 자원을 노골적으로 포식하는 ‘약탈적 재편’의 단계로 완전히 진입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산 제품에 대한 관세 폭탄을 철회하는 대가로 받아낸 ‘그린란드 미래 협정’은 그 서막에 불과하다. 동맹의 가치가 현금과 자원으로 치환되고, 안보라는 명분이 경제적 실익을 위한 인질로 잡히는 냉혹한 거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협정의 이면은 섬뜩할 만큼 명확하다. 미국은 미사일 방어 체계인 ‘골든 돔(Golden Dome)’ 배치를 구실로 그린란드의 희토류 채굴권과 북극항로의 안보적 배타권을 영구히 접수했다. 이는 외교적 합의가 아니라 사실상의 전략적 자산 몰수다. 미국은 이제 달러 패권이라는 금융 도구만으로는 부족해, 동맹국의 영토와 핵심 자원을 직접 흡수하여 자신의 근육을 키우는 ‘벌킹 업(Bulking up)’ 전략을 숨기지 않는다.
1. 외교의 지평
동맹의 채권추심화와 그린란드 협정의 실체
다보스 포럼에서 전해진 유럽산 제품 관세 철회는 낭보가 아닌 독이 든 성배였다. 덴마크가 서명한 ‘그린란드 미래 협정’은 명목상 안보 협력이지만, 그 실질은 희토류 채굴권과 북극항로 배타권이라는 실물 자산을 미국에 상납한 경제적 신체 포기 각서에 가깝다.
트럼프는 이 협정을 통해 그린란드의 얼음 아래 묻힌 디스프로슘, 이트륨 같은 핵심 광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미국의 우주 기반 미사일 방어 체계인 ‘골든 돔(Golden Dome)’의 핵심 거점을 구축하려 한다. 이러한 약탈적 재편은 기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스템의 파산을 의미한다. 더 이상 세계 경찰의 역할을 위해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밀린 안보 비용을 받으러 온 냉혹한 채권추심업자의 논리가 국제 질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미국은 이제 달러 패권이라는 무형의 금융 도구를 넘어, 동맹국의 전략 자산을 직접 흡수하여 자신의 체력을 키우는 전략을 노골화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에 대응하는 덴마크의 금융적 역공이다. 덴마크의 주요 연기금인 아카데미커펜션(AkademikerPension)은 미국의 그린란드 매입 압박과 관세 위협에 맞서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전량 매각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히 미국 재정의 불투명성에 대한 경고를 넘어, 동맹의 자원을 약탈하려는 미국에 대해 유럽 자본이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자본 무기화’의 신호탄이다. 덴마크는 미국채 매각을 통해 미국의 아킬레스건인 재정 적자와 달러 신뢰도를 직접 타격함으로써, 영토와 자원을 지키기 위한 비정한 금융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안보 비용을 아끼며 누려온 ‘이중장부’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독일이 러시아 가스에 의존해 제조 원가를 낮추고, 프랑스가 중국 시장에 명품을 팔기 위해 ‘전략적 자율성’을 외치던 위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동맹의 살을 깎아 미국의 근육을 키우는 냉혹한 설계자이며, 이에 맞서는 덴마크의 국채 매각은 강대국이 동맹의 희생을 전제로 움직이는 시대에 소국이 취할 수 있는 실존적 저항의 시작이다. 이제 동맹은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거대한 포식자의 체력 유지를 위해 자산을 상납하거나 혹은 그에 맞서 자본의 칼날을 겨눠야 하는 비정한 생존의 전장으로 변모했다.
2. 산업의 맥락
기술 주권의 인질극과 반도체·배터리의 강제 이주
동맹의 살점을 요구하는 칼날은 이제 한국 경제의 심장이자 대뇌피질인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을 정조준하고 있다. 덴마크가 국가의 영토를 내어주며 생존을 도모했다면, 한국은 첨단 산업의 근간인 ‘기술 제조 역량’ 전체를 저당 잡힐 위기에 처했다.
미국 상무부가 검토 중인 ‘미국 내 제조 점유율 할당제’는 단순한 자본 유입을 위한 투자 유도를 넘어선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활을 걸고 개발한 차세대 고대역폭베모리(HBM4)와 엔비디아의 차세대 인공지능(AI) 플랫폼인 루빈(Rubin) 기반 칩의 핵심 물량을 반드시 미국 본토 팹(Fab)에서만 생산하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기술 인질극’이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ct)’을 통해 제공한 보조금을 강력한 족쇄로 활용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거점들이 송전망 확충 지연과 전력 공급 불안, 각종 환경 규제에 묶여 설비 투자 계획이 표류하는 사이, 텍사스와 애리조나의 미국 현지 공장들은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라는 당근, 그리고 ‘미국 내 생산이 아니면 시장에서 퇴출하겠다’는 노골적인 채찍을 동시에 마주하며 가동률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는 한국의 생산 기지가 통째로 태평양을 건너가는 ‘강제 이주’의 서막이다. 배터리 산업의 형편 역시 다르지 않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저가형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파상공세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현지화 압박이라는 거대한 맷돌 사이에 끼어 있다. 중국은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미국은 자국 내 공급망에 들어오지 않으면 보조금 혜택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한국 배터리의 수익성을 깎아내리고 있다. 이 고통스러운 연삭 과정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국내 고용과 투자를 줄이고 미국 현지에 생산 라인을 증설해야 하는 뼈아픈 선택지로 내몰리고 있다.
결국 우리가 직면한 본질적인 질문은 하나다. 우리가 내밀어야 할 ‘한국판 그린란드’는 과면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공장을 미국으로 옮겨주는 수동적인 양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유한 대체 불가능한 공정 기술과 메모리 반도체의 초격차 지배력을 카드 삼아, 미국의 전략적 자원과 안보적 보장을 어떻게 맞교환할 것인가라는 고도의 ‘수 싸움’이 필요하다. 약탈적 재편의 시대에서 기술 주권은 구걸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우리를 결코 배제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성’을 증명할 때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에너지의 동력
그리드 민족주의와 에너지 고속도로의 사명
약탈적 재편의 또 다른 전선은 국가의 혈액이라 할 수 있는 ‘에너지 주권’에서 형성되고 있다. 현재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기후 정의라는 명분과 자국 우선주의라는 실리가 충돌하며 거대한 모순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CBAM)가 본격 가동되면서 한국의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전통적인 수출 효자 품목들은 가공할 만한 ‘녹색 관세 장벽’ 앞에 섰다. 이제 탄소 배출량을 수치로 증명하지 못하거나 기준을 넘어서는 제품은 유럽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더 가혹한 압박은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부터 들려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후 위기론을 ‘사기’라 일축하며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지배력(Energy Dominance)’ 전략을 노골화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기후 변화를 부정하면서도 미국의 셰일 가스와 석유를 충분히 수입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징벌적 환경세’ 혹은 그에 준하는 무역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다. 탄소를 줄여 수출길을 열어야 하는 유럽의 요구와, 미국의 화석 연료를 더 많이 사가라는 트럼프의 요구 사이에서 한국 제조 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그리드 민족주의(Grid Nationalism)’의 샌드위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26년은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전 세계가 ‘전력 배고픔’에 시달리는 해다. 이제 안정적이고 저렴한 무탄소 전력을 적재적소에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단순히 경제 지표를 넘어 국가의 안보이자 생존 무기가 되었다. 서남해안의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과 핵심 산업 거점으로 직접 실어 나르는 지능형 전력망, 즉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은 국가의 산업 맥을 잇는 사활적 과제다. 이는 단순한 토목 사업을 넘어, 구글이나 애플 같은 글로벌 빅테크들이 요구하는 ‘24/7 CFE(24시간 일주일 내내 무탄소 에너지 공급)’ 기준을 실질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만약 우리가 이 에너지 인프라 경쟁에서 뒤처진다면, 한국의 핵심 제조 기업들은 전력을 찾아 해외로 떠나는 ‘에너지 망명’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4. 금융의 흐름
환율 변동성과 내쉬 균형의 역설
금융 시장의 좌표는 여전히 비정상적인 변동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한때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0원을 위협하며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원·달러 환율은 1450대를 오르내리며 다소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이재명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관련 책임 당국에 의하면 한두 달 지나면 1400원 전후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한다”라고 언급하며 시장의 과열된 심리를 안정시킨 결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고환율 기조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환율이 1400원대 중반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 경제는 여전히 수입 물가 상승과 제조 원가 부담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 연준의 고금리 유지와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환율의 하향 안정화는 단순한 수치 하락을 넘어 우리 경제의 ‘정책적 유연성’을 다시 확보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여기서 존 내쉬의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은 현재의 약탈적 국제 질서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틀이 된다. 내쉬 균형은 각 참여자가 상대의 전략을 고려해 최선의 선택을 할 때 도달하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공동의 이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각국이 자국 이익만을 위해 보호무역과 관세 전쟁이라는 ‘배신’의 전략을 선택할 때, 세계 경제는 서로를 불신하며 모두가 패배하는 최악의 내쉬 균형, 즉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약탈적 재편은 바로 이러한 불균형을 의도적으로 조장하여 미국의 실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결국 2026년의 세계 경제는 더 이상 상생과 협력을 말하지 않는다. 강자가 동맹의 전략 자산을 흡수하고, 기술과 에너지를 볼모 삼아 자국의 근육을 키우는 비정한 약탈의 정글이다. 덴마크가 그린란드의 자원을 내어주고,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이 미국 본토로의 강제 이주 압박을 받는 현실은 이 거대한 재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위기를 상징한다.
환율 1500원의 공포를 넘어 1400원대로의 연착륙을 시도하는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표의 등락이 아니다. 어떤 포식자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산업 경쟁력’을 구축하는 일이다. 약탈적 재편의 파고 속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본질은 차가운 경제 수식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혁신의 안목과 독보적인 기술 주권이다.
약탈의 시대가 강요하는 최악의 내쉬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상대가 우리를 배제했을 때 감당해야 할 손실이 더 크다는 점을 실력으로 증명하는 데 있다. 2026년, 한국 경제가 그려야 할 지도는 타인의 압박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만의 초격차 경쟁력으로 새로운 생존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자부심을 그려나가야 한다.
조원경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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